영성자료

[스크랩] ☞ 밝음과 유쾌함이 우리의 힘이다 / 정원 목사

아 푸른하늘 2010. 7. 1. 15:42
* 밝음과 유쾌함이 우리의 힘이다 -정원 목사

이상하게도 밝고 명랑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교회 안에서 보는 이들, 특히 신앙이 좋다고 알려져 있는 이들 중에는 참으로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복음의 진리는 빛과 같은 것인데 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서 사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이 이렇게 표현했다.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마5:16)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단순히 주님이 거기에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빛이 비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 이전에 주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찬란한 빛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가? 그리스도인들이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단순히 옆에 있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빛과 행복과 즐거움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가?


이상하게도 현실은 반대인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우중충하게 보이는 것 같다.
교회 안의 사람들 중에 생기 있고 발랄하고 유쾌하며 즐거운 이들은 별로 보기 어려운 것 같다. 뭔가 자유롭고 찌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희한한 것은 신앙이 조금 헌신이 덜 되어 있고 세상 적인 요소도 꽤 남아있는 듯이 보이는 이들은 조금 밝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욱 더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는 이들이라든지, 영성을 추구한다든지, 더 깊은 헌신을 원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둡고 우울하며 침침하게 보이는 경향이 많은 것이었다.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중간에 한동안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세상에서 헤맬 때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사회 생활을 하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에 알고 사귀던 친구들과 나중에 신앙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이들과의 교제를 비교해보았다. 즉 불신자 친구들과 헌신된 친구들을 비교해본 것이다.
그 차이점은 이러했다. 전자는 대부분 유쾌하고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후자들은 대부분 어둡고 율법적이고 정죄적이고 우울하고 소극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불신자들은 세상을 즐기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중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은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도 목사이긴 하지만 나는 사역자들을 별로 만나지 않았었다.
여러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 중의 하나는 사역자들과의 만남은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역자들은 대체로 너무 젊잖고 말이 없다. 아마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어렵게 느끼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있으면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관계 - 그러한 만남은 누구에게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해도 잘 웃지도 않고 뭔가 불경건한 사람으로 보는 그러한 분위기 - 그러한 상태에서는 별로 말하는 것이 재미없고 썰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 부흥회의 열기가 뜸해졌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는 부흥회가 참 많았다. 그것은 마치 교회의 잔치와 같았다.
부흥회가 열리면 동네의 여러 교회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많이 모였다. 지금이야 워낙 교회마다의 벽이 높아져서 근처 가까운 곳에서 부흥회를 해도 사람들은 가지 않는다. 또한 부흥회말고도 재미있는 것이 많고 다들 바쁘고 별로 영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도 없기 때문에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하게 모여서 부흥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부흥사의 이야기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흥사들의 구수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울고 웃었다.

물론 당시 부흥사들의 메시지는 깊지 않았다. 기껏해야 목사를 잘 섬겨야 복을 받으니 담임 목사를 잘 대접하라. 아니면 결단하고 작정해서 건축헌금을 드려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었고 구성지게 풀어 가는 예화나 말씀도 거기에 초점을 둔 것이 많았으니까 별로 대단한 메시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어 갔을까? 그것은 여유롭고 넉넉한 분위기였다. 흥겹고 즐거우며 웃음이 있는 분위기 - 사람들은 거기에서 삶의 피곤과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날카롭고 예리하며 깊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자들 - 그러한 이들은 대체로 그러한 여유로움과 풍성함이 없다. 그러한 메시지는 아주 합리적이고 분명하지만 사람들의 심령에 그다지 충격과 활력을 주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깊다고 느껴지는 사역자들은 약간 우울질의 성향까지 있는 것 같다.

영성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어떤 사역자가 그의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떨어진다면 그는 자꾸 유머와 농담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가 볼 때는 유머와 농담은 영적으로 약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이다. 하여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얼마나 우울하고 창백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유머, 농담, 기쁨과 밝음은 결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어두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발성 기도의 부족에서 온다. 부르짖는 기도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직접 큰 소리로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고 외치지 않으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지 않는다.

입으로 선포되고 시인되지 않은 진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머리는 많은 것을 이해하고 깨닫지만 막상 그의 안에 있는 어두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우울하고 어둡고 비판적이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발성기도와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는 이들은 그러한 고백과 시인과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그래서 몸 안에 있는 어둡고 나쁜 기운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밝고 맑고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흥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부분 산에서 나무를 한번쯤은 뽑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르짖는 기도와 외침의 경험이 많이 있다.
자연히 이러한 이들은 소리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과 몸의 은사인 치유 능력과 불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 이들이 인도하는 집회는 강렬한 불과 흥겹고 즐거운 영의 흐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발성의 훈련이 되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많이 묵상하고 연구하고 깨달아도 막상 그가 집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 충격을 받고 변화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사역자가 성도들에게 왜 깨지지 않느냐고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그들에게는 별로 영향력이 가지 않는다. 발성기도를 배우지 않는 사역자들에게는 능력이 임할 수 없는 것이다.


우울하고 어두운 이들은 그들의 배속에 흑암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도의 기법을 조금만 배우고 조금만 소리내는 기도를 해보면 곧 마음이 밝아지고 여유와 웃음이 생기며 삶이 즐겁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복잡한 사고형의 사람이 단순하고 밝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으로 차츰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밝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능력이다. 우중충하고 어둡고 눌려있는 자세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봉사를 해도 별로 열매를 맺기 어렵다.

어떤 고뇌 어린 표정으로 가득한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하러 나갔다.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제시했는데 상대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종교 문제 외에도 골치 아픈 문제들이 너무 많이 있거든요."
이 메시지는 간단한 것이다. 고뇌 어린 표정으로 전도하는 것은 기독교가 고뇌로 가득한 종교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삶이 피곤한 판에 짐을 하나 더 얹어주려고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전도하기 위해서 기쁨으로 가득한 연기를 하려고 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가 아닐 때에는 고생만 할 뿐 별로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봉사보다 자신의 영성을 훈련하고 강건하게 해야한다. 이것은 이기적인가? 하지만 우리 자신이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남들에게 줄 것이 없다. 내가 배고픈데, 나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남을 먹일 수가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밝게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그것이 우리의 봉사와 사역을 풍성하게 해 준다.

어디선가 '양고기 전도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개가 물고 있는 뼈다귀를 함부로 빼앗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물린 다는 것이다.

그 뼈다귀를 빼앗으려고 하지 말고 개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 기름이 잘잘 흐르고 좋은 냄새가 나는 양고기를 놓아두라고 한다. 그러면 개는 그 뼈다귀를 내려놓고 그 양고기를 물게 된다는 것이다.
양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적도 없지만 아무튼 이 메시지는 간단하다. 상대방을 복음으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저 강요만 하지 말고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매력이 없다. 별로 삶이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열심히 남에게 권유를 해보아도 재미있게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별로 없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불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불신자들이 우울하고 피곤하고 지치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망과 기쁨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밝고 맑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도 하나의 복음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에 하나의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의 빛이 되신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외치고 그의 왕되심을 선포하며 기도할 때 그 영광의 빛과 능력과 기쁨은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나 조용하다.


대부분의 말은 목회자 혼자서 다 하며 성도들은 입을 벌릴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는 영이 밝고 자유롭고 강하게 되기 어렵다. 따라서 항상 우울하고 소극적이며 답답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경건하고 성숙한 상태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눌린 상태이다. 그것은 영적인 침체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발성기도가 부족하다. 그래서 영혼이 눌리고 막혀있는 것이다.

나의 인상적인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십 여년 전에 어느 기도원을 청년들 몇을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며칠동안 그 곳에서 기도하고 쉴 작정이었다. 그곳은 고요한 묵상 중심의 영성수련원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씩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는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기도원에 도착하자 안내자는 우리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름 등의 인적사항을 쓰도록 했다.
한참동안 우리가 쓰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더니 한 손으로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기도원 수칙이 적혀 있었다. 아마 읽어보라는 것이리라.
그 다음에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인도 받았다. 물론 말 한 마디 없이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갔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분위기가 몹시 경건하고 좋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답답했다. 도대체 여기에 우리가 왜 왔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각자가 혼자 방을 차지하고 헤어지자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대화는 해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살금살금 한 방에 모여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간히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우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 거렸다.

기도원의 시설이나 규모는 어느 정도 큰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이 어느 정도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개미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모두 자기 방에서 침묵 기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나중에야 그 소리가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허겁지겁 식당에 도착하자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밥을 먹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뜨뜻해졌다. 누군가 무지하게 경건한 목소리로 식사기도를 드리고 식사는 시작되었다.

식사시간에도 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카세트 테잎의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경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는데 그내용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인 것 같았다.
항상 요란하게 떠들면서 식사를 하는 우리로서는 견디기 쉽지 않은 고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지가 궁금했다. 시간이 되어 예배 장소에 가자 십 여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분위기는 역시 조용했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의 외식과 불경건에 대하여 심하게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내용은 옳은 것 같았다. 그러나 듣기에 아주 무서웠다. 우리는 모두 기가 죽어서 쫄아 있었다.

그 날 밤을 보내고 우리는 새벽에 탈출을 시도했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도망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기도원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답답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그냥 즐겁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묵상 기도도, 침묵 기도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뭔가 정죄적이고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가 우리는 싫었다. 우리는 행복한 냄새를 맡고 싶었다.

우리는 기도원을 나와서 버스를 타자 신이 나서 외치고 떠들었다. 눈치를 보면서 숨을 죽이고 말하지 않고 마음놓고 떠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하루만에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당초에 며칠을 작정하고 갔다가 하루만에 돌아가는 것도 좀 이상해서 우리는 근처에 있는 다른 기도원으로 갔다.
그곳은 치유사역을 많이 하는 곳이다. 그래서 신나게 찬양을 드리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조금 전의 기도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기도원이었다.

신나게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썰렁한 기분은 많이 회복되었다.
저녁이 되어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몹시 배가 고팠다. 그래서 중국집에 갔다. 그런데 짜장면을 먹기에 돈이 모자랐다.
우리는 사정을 해서 짜장면 값을 깎았다. 그리고 나서 중국집에서 짜장면 값을 깎는 것은 우리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참 웃었다. 하루 전의 그 경건하고 고요한 식사시간과는 전혀 다른 웃음과 장난과 요란함이 가득한 식사시간이었다.
마음껏 찬양하고 소리 높여 기도하고 큰 소리로 주님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면서 우리는 참으로 즐거웠다. 마음껏 웃어도 된다는 사실이 우리는 아주 행복했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서 우리는 집으로 왔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하루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신앙이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그렇게 믿으면 된다.
때에 따라서 깊음과 고요함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밝고 즐겁고 유쾌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속으로 주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입으로 외치고 선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음 속의 묵상은 마음을 정화시키지만 입에서 나온 외침은 내 몸도 바꾸고 세상도 바꾸고 우리가 거하는 그 공간을 주님의 빛과 영광과 아름다우심으로 가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우울하고 소극적이며 여린 기질의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이 자신을 바꾸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즐겁고 밝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큰소리로 주님의 왕 되심을 외치고 부르짖으라.
그리하여 당신의 안에 있는 모든 우울함, 어두움이 빠져나가게 하라.
하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라.
부디 밝고 맑고 유쾌하고 즐겁게 살라.
주님과 같이 걷는 삶은 결코 비극적이고 어두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도 날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다.
이 짧은 인생을 최대한 누리고 즐기라.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게 살라. 그렇게 주님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아니겠는가?
출처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글쓴이 : 차니미니파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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