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난제해설
구원의 영원성과 난해구절
해설
서 론
1. 마태복음 12장 31,32절
마태복음의 구조와 성격
성령을 훼방하는 죄
2. 마태복음 13장 3-8절
3. 요한복음 15장 1-8절
4. 로마서 11장 21,22절
5. 고린도전서 6장 9,10절
6. 디모데전서 5장 6,11,12절
7. 히브리서 6장 1-8절
8. 히브리서 6장 4-8절
9. 야고보서 2장 14-26절
10. 요한일서 5장 16절
11. 요한계시록 3장 1-6절
1. 마태복음 12장 31, 32절
마태복음 1:12장 31,3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이며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못하리라"(마 12:31,32).
진실로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이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며,"성령을 훼방"하거나 심지어 말로라도 거역하면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인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귀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의 구조와 성격
여러분이 마태복음의 내용의 구조를 아신다면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 죄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바로 그 약속의 자손이요, 또 다윗의 위를 계승할 약속된 메시야 곧 이스라엘의 임금이심을 증거하는 복음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대상과 배경이 유대인과 유대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10장 5,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라고 한 복음도 오늘날의 은혜의 복음이 아닌 천국복음이었습니다.
10장 7절에 이르시기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알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1장부터 1:12장까지 보면 매우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왕족 혈통에서 나신 분임을 증거하는 족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신 요셉까지 나와 있습니다.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서 정식으로 환영을 받고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앞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백성들 앞에 왕으로 나타나시기 전, 침례 요한이 왕궁 대변자로서 왕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마 3:3)고 외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왕을 세울 때마다 기름을 부어 백성 앞에 선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초림시에도 침례 요한시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시에도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말 4:5,계 11:6).
예수님의 왕 되심이 정식으로 선포되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원수를 대적하여 이기심으로써 그 사실을 증거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단과 싸워 승리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능히 그의 백성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정책을 수행할 각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최초의 각료로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그리고 그 후에 여덟명을 더 택하셨습니다.
그 다음 5장에서 7장까지는 우리가 산상보훈이라고 일컫는 그 왕국헌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영접했을 경우에 그 왕국을 다스릴 법률이었던 것이고 또한 그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지상재림 후에 그의 천년왕국을 수립하실 때 사용할 법률이 될 것이기도 합니다.
8장과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왕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행하신 많은 기적과 표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중풍병자를 회복시켜 주시며 혈루증 앓는 부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죽은 어린 소녀를 살리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 곧 왕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이 이상 더 무엇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정식으로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왕 되심을 증거한 이 모든 권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11장과 12장의 내용입니다.
11장을 보면 왕의 대변자 침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천국복음을 어떻게 취급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제 12장에서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 을 대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2장 2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부하라고 비방했습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허물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던 것입이다.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부인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성령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셨을 때에는 아무도 그분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령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을 보고도 성령님을 더러운 귀신으로 취급하는 등 성령님을 모독하는 말을 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정면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영원히 용서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배척한 죄에 대해서는 성령님을 훼방한 죄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줄 아노라...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7 -20)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51-53절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 그들이 성령님을 거스린다고 말씀하셨고 또 그들을 사도행전 3장과는 달리 "살인한 자"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후에 성령님을 통해서 증거해 주셨지만 끝내 목을 곧게 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인들이 범한 죄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과 10장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는 그러한 죄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나 데마나 구약의 롯과 같이 될 수는 있어도 가룟 유다와 같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실히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3. 요한복음 15장 1 - 8절
여러분은 혹시 남모르는 슬픔이나 시련, 또는 시험을 당하고있지는 않습니까?
형태는 다 다르더라도 시련을 당하고 있지않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오는 시험도 있을 것이고, 또는 질병이나 교통사고, 실직으로 인해서 고생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주님의 뜻을 떠나서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죄를 범함으로 주님의 채찍을 받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폐일언해서 지금 여러분이 어떠한 시련을 당하고 계실지라도, 또 아무도 그것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깊이 이해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시련과 연약함을 이해해 주실 뿐만 아니라 깊이 동정하며 기도까지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
다만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 예수님께서는 시험받고 있는 우리를 능히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연약함이 많은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격려의 말씀을 의지하시고 긍흘하심을 받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8장 1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말하고 있는 전 요지가 이렇게 위대하시고 뛰어나신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여러분!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그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얼굴의 광채가 여러분의 마을 속에 비치어 흠뻑 젖을 때까지 그 분을 앙망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련의 쓴맛이 단맛으로 변할 것이고 그것을 보시는 주님께서도 만족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도 겸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시련의 어려움을 이기시며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유의할 점
함께 살펴볼 난해구절은 요한복음 1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 말씀도 언뜻 보면 구원얻은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대명사나 접속사, 또는 단수냐 복수냐 하는 것까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거듭 거듭 약속한 그 말씀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손"이란 낱말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우리"란 대명사도 나오고 "너희"라는 대명사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의미하는 대상이 서로 다릅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그러면 이제 요한복음 15장 1절부터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요한복음이 1장에서 12장까지와 13장에서 21장까지의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장에 서 12장까지는 불신하는 세상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 13장에서 21장까지는 단지 예수님을 믿은 참 제자들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와 같이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처럼 "내가 ㅇㅇㅇ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타락한 유대교, 즉 과거의 하나님의 증인의 역할을 해오던 유대교를 부정하심으로 상대적으로 하신 말씀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것은 이제는 유대교가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는 유대교를 포도나무라고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대교가 포도나무가 아니요 예수님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포도나무라고 하실 때 "참"이란 말씀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시편 80편 8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포도나무로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찬송하리로다 그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고후 1:3)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엡 1:17)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 15장은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므로 과실을 더 많이 맺는 것을 그 주제로 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라고 하는 낱말이 참으로 거듭난 신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좇아온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이나 31장 지절의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네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참 제자들을 구별하심
요한복음 15장 2-4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입장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께서 2절 상반절에서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실 때 아마 가룟 유다와 유대교인과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2절 하반절에서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곧 그 다음 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0,11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깨끗해진 참 제자들과 그렇지 못한 가룟 유다를 구별하고 계신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15장 6절을 전후해서는 제자들을 일컬을 때 "너희는", "너희가" 하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계시지만 이 6절의 말씀에서는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니라"고 하심으로 그 대명사를 "너희"로부터 "사람"으로 조심스럽게 바꾸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셨지 제자들을 가리켜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8)는 말씀이 제자들을 지적하여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2,3절에 말씀한 대로 과실을 맺고 또 더 맺도록 이미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할 일이란 과실을 더 맺기 위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실을 맺을 때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8절).
나는 지금 어느 부류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는 그 무리, 즉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고,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깨끗함을 받은 그 무리 중에 속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은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장차 밖에 버리워 불에 던져 불사름을 받을 자들 중에 속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불이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정죄한 이 패역한 불신의 무리들로부터 예수님께로 나아온다면 구원을 받습니다.
지금은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이 구원의 문이 닫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능사거나 장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러분이 회개할 죄인인 것을 말할 뿐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4. 로마서 11장 21, 22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고하게 됨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라도 구원의 문을 닫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적막한 처지에 있겠습니까? 기회가 소중하다는 것은 그 기회를 잃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제3의 기회가 없다는데 그 엄숙함이 더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회개치 아니함과 믿지 아니함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며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분들에게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5).
성령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이유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그 마음의 완악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집은 자기와 자기의 것에 대한 애착심 또는 자존심의 변형입니다.
그런 사람은 근시안적입니다. 그 생각하는 세계가 좁고 자기가 주인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합리적이고 순리적으로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실한 친구도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진실로 고집은 이익도 타당성도 승산도 없는 백해무익한 병폐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이 꼭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꼭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불신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
빛을 등진 사람의 얼굴이 밝을리 없고 사랑을 버린 사람의 마음이 행복할리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회개치 아니한 마음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마음의 변형입니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은 잘못을 하면 그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려고 하는 대신에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을 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종종 듣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쁘니 예수님 믿기를 원하지 않으며 내 마음만 잘 지켜 간직하면 된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못 믿겠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일종의 책임전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반성하며 회개하려 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그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1-5).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
그러면 이제부터 난해구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로마서 11장 21,2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 말씀도 언뜻 보면 구원얻은 사람이 그 얻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구원의 절대성에 관해서는 로마서 8장 30-39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미 증거했습니다.
30절을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함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실제로 이미 영화롭게 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31절에서 "그런즉 이 일(30절의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면..."라고 말하지 않고"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한 이 "누가"라는 말속에는 하늘의 천사들과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와 이 땅의 모든 피조물, 기타 땅 아래에 또다른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도 다 포함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여 이길 자가 천상천하에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33절을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이상 누가 우리를 송사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마귀나 우리 양심이 우리를 송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송사라 할지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상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34절에 말씀하시기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하고 묻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취소되지 않는 이상, 또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쫓겨나지 않는 이상,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 예수님께 벌을 내리시고 또다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보면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지 않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라면 그 무엇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겠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 것입니다.
아가서 8장 7절의 말씀대로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사야 49장 14-16절에 기록된대로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고 한 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그러면 로마서 8장에 우리의 구원을 절대 확증하고 있는 말씀이 가득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마서 11장에서는 그 얻은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와는 다른 대상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의 주제, 즉 전 세상 사람들의 구원 문제를 논하고 있다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섭리상으로 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별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8장까지에는 구원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지만, 9장부터 11장까지에는 그것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문제 자체를 논하고 있지만, 9장부터 11장까지는 구원 문제 자체보다는 이방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장 11절에서는 "...저희의(이스라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12절에서도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 즉 이스라엘 민족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또한 15절에서도 "저희를(이스라엘)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이라는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버린 것 그 자체가 세상의 화목을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버림받은 것이 세상의 화목의 기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문의 말씀인 21,22절의 말씀을 본다면 그뜻 역시 구원받은 우리가 꺾이우고 찍히우고 버림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주어진 그 구원의 축복의 기회가 끊기운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이방인은 머지않아 이 구원의 기회가 끊기우고 원 가지인 이스라엘 민족이 그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의 경고 그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당신의 행위에 의지하려 하는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의 고백이 이와 같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인자가 당신에게 머물 것입니다.
5. 고린도전서 6장 9, 10절
전도서 11장 4-6절을 보면 성도들에게 격려가 되는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풍세를 살펴보는 자"와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농부의 핑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일하기가 싫으므로 구실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 환경과 처지만 생각하고 탓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혹 우리 중에 나는 배운 것이 적고, 부족하고, 가난하고, 흠이 많고, 또 나는 병들고 나약한 사람이니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근면한 농부의 생각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말도 못됩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에게 있어서 그 씨가 싹이 나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그의 책임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씨를 뿌릴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싹이 나게 하거나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너는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이 못함이니라"입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면 그것이 당장에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렸는데도 싹이 당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염려하는 성도가 있다면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에게는 전도서 11장 1절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 때 그가 당장에 구원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던가 혹은 자라면서 친구들에게 전도를 받은 적이 있던가 혹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혹은 이웃에서, 혹은 노방에서, 혹은 전도지나 방송같은 것을 통해서 이미 그 마음속에 씨가 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영혼이 구원받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수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고전3:7)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합시다.
어떤 겸손한 종이 그렇게 합당한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집회에서 어느 성도가 그 분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날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제 말씀이 좋아서 축복을 많이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하나님의 종은 "어제 제가 전한 말씀 중에 좋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다
여러분, 씨를 뿌리는 자가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2~편 5,6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이 말씀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란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참되게 할 때에 거기에는 남이 모르는 많은 눈물이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하는 데는 눈물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거둔다고 하였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일에 눈물을 흘리는 진실된 일꾼들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순교를 앞두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한 유언의 말씀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해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양의 성품과 돼지의 성품
난해구절인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언뜻 생각해 보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음란이나 우상숭배, 또는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취하거나 후욕하거나 토색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되는, 결국 멸망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거듭난 사람은 "양"으로(요 10:27),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돼지"(벧후 2:22)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과 돼지는 성품에 있어서 서로 다릅니다.
양은 항상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나 돼지는 그 반대입니다.
돼지는 더러운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양은 한눈을 팔다가 더러운 웅덩이에 빠질 수 있어도 거기서 헤어 나오려고 애씁니다.
이는 그의 성품이 더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돼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돼지는 더러운 곳에 코를 대고 쑤시며 또 더러운 곳을 찾아 그곳에 누워 뒹구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겉모양을 보지 않더라도 두 동물을 행동과 성품만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스스로 거듭났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에 열거된 죄악 중에 습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것은 요한일서 2장 4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거듭난 사람은 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니...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거듭난 신자라도 주님을 잘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져서 다윗과 같이 무서운 죄에 빠지거나, 베드로와 같이 죽음이 무서워서 주님을 후욕하며 부인하는 최악의 경우에 이르는 일이 혹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얻은 구원을 잃고 멸망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과 베드로가 지금 다 하늘나라에 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는 믿지 않는 자
그러면 이제 본문 말씀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절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불의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고 4절에서는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 그리고 6절에서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9절에서 또다시 "불의한 자"라고 부르면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강한 어조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말씀한 "불의한 자"는 불신자를 통칭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고 있거나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어도 "불의한 자"라고는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11절에 증거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5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교중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서는 "외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믿는 자들을 "성도"라 부르고 믿지 않는 자들을 "불의한 자"라고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가운데 자신이 거듭났다고 자처하면서도 본문에 열거된 어느 죄악 중에서 습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본문의 경고의 말씀을 명심하여 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당신을 깨우치고 있음을 명심하시고 다시 읽어보십시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 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해 그러한 죄악 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죄악을 버리고 사랑의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 디모데전서 5장 6, 11, 12절
디모데전서 5장의 난해구절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경건한 중에 진리를 순종하며 또한 진리 안에서 경건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훈들을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교훈들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 잘 기록되어 있으니 그 말씀들을 여러분이 자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무질서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암혹시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였듯이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사 5:20-24)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람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때이며 또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딤전 1:5)을 버림으로써 믿음에 있어서 파선하는 사람들 의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에베소 교회는 그때 이미 그 형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로 더욱 악화될 것을 사도 바울은 내다보고 에베소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여러가지 교훈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엄숙한 마음과 자세로 사도 바울이 경계하신 교훈들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3절에서 그 경계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러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6,7)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경계의 말씀을 1장 19절에서 디모데에게 또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그러나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고 하여 기도할 때의 바른 자세를 명하는가 하면 "또 이와 같이 여자들은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9-15)하며 여자들의 복장문제와 단정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특히 감독의 자격 중에서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1절)라고 강조하고 있고, 또 집사의 자격 중에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9절)라고 한 말씀 중에서 "깨끗한 양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2절)고 경고하고 있고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고 하여 "경건"을 강조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과부로서 명부에 올릴 자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란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9,10절)라며 "선한 행실"을 강조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3절)라고 한 말씀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11절)라고 한 말씀을 중점으로 경계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6:17,18)고 한 말씀을 더욱 주목하여 교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청결할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떠날 때에 율법의 선생이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4:5-7).
둘째로 착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에서 떠나 파선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1:19).
셋째로 양심이 화인 맞았을 때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된다고 하였고 또 외식함과 거짓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4:1.2).
넷째로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그는 친만해져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며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해져서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3-5).
이상의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청결한 마을과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우리 자신을 주님과 진리 안에서 가장 건전하게 지키는 일임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쓰러져가는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는데 힘쓰는 자들뿐인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자의 구원은 영원하다
그러면 이제 디모데전서 5장 6,11,12절의 난해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6절).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11,12절).
이 말씀은 그렇게 난해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신자의 구원의 영원성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5장 1-16절은 신자의 구원 문제를 논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고 신자의 생활문제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의 말씀은 의지할 곳 없는 과부들의 부양문제를 그 주제로 함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5절은 참 과부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의지할 곳 없는 과부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과부들에 대해서는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여기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죽었느니라"고 말씀했으니 생명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죽었느니라"고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과부들에게 생명이 있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볼 때 5절에서 말씀한 참 과부들과 같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며 경건하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 5장 5절의 말씀과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살았으나" 간증상으로 볼 때 "죽은 사람", 곧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눅 15: 24)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탕자가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교제에 있어서 죽은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다가 다시 회복되어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한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생명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교통함에 있어서는 그 교제가 단절된 것임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고 한 말씀도 의심 많은 마음으로 보면 자기의 구원을 능히 회의하게 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상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선 이 말씀은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14절에 젊은 과부들에 대해서 재혼할 것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말씀의 전 강조점은 정욕에 있는 것입니다.
6절의 예와 같이 정욕에 이끌려서 일락을 좋아하므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말씀한 것이지 재혼 자체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거나 처음 믿음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15절에 보면 이와 같이 정욕에 끌리기 쉬운 젊은 과부들 가운데에는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생활에서 떠나 일락을 취미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심판을 받느니라"고 한 말씀은 단순히 징계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쓰인 심판의 원어는 "정죄"를 뜻하는 낱말이 아니라 "징계"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같은 낱말이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느니라"고 한 말씀의 그 "죄"라는 말과 같은데 그 "죄"라는 말이 난하주에 보면 "판단"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곧 그 다음 구절에 말씀하고 있는 "징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이 말씀에 이어지는 32절을 보면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죄정함"이란 낱말이 곧 "정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모데전서 5장 12절의 "심판을 받느니라"는 낱말은 "정죄"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징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뜻하는 것은 구원얻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잃는다든가 또는 정죄를 받게 될 위험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그러면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신자는 세상 일락과 육신의 정욕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기도와 간구하는 헌신된 생활을 하라는 것이며, 또한 시간의 여유가 많은 사람들은 집집에 돌아다니며 게으름을 피우고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분주하게 일하는 것이 자기 영혼을 지킴에 있어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본의 아니게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에게 훼방할 기회를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7)는 말씀을 유의하여 마음에 간직함이 좋을 줄로 생각합니다.
7. 히브리서 6장 1 - 8절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먼저 간 조상이나 부모, 또는 먼저 간 자식, 남편, 아내, 또는 가까운 친구들의 모습이나 인품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먼저 간 사람들이 실제로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육체는 지금 무덤 속에 묻혀 있거나 화장되어 강물이나 공기 중에 섞여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영혼들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조상들을 생각하며 제사를 드리는 여러분도 본의이든 아니든 그 사실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제사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들의 영혼이 그 음식을 먹으러 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 영혼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과 또 그 영혼들이 지금 어느 처소에 가서 어떤 처지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에 대해 친히 말씀하신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하실 것은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실화라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0).
저는 히브리서의 난해구절을 묵상하는 중에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여러번 경고하고 있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위와 같은 경고와 아울러 권면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심으로 영원한 불행을 면하시고 하늘나라를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의 특수성
난해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8절 말씀입니다.
그중 먼저 4-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히브리서의 특수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대상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 하시던 말씀, 행하시던 능력을 친히 듣고 목격하고 난 다음에 유대교를 떠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나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섞여 나온 무리들처럼, 참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끼어 있었는가 하면 또한 광야에 나온 다음에도 하나님의 진노을 더욱 더욱 격동시켜 노하시게 하여 하나님으로 맹세까지 하게 하시기를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3:11)고 한 바로 그런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믿지 않은 사람들인 것은 3장 11,18절이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뿐만 아니라 4장 2절에 보면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우리", "너희"가 가리키는 대상
우리가 또 한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즉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란 대상과 "너희"란 대상 그리고 "너희 중에"(그들 가운데서 예외적인 사람들)라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너희 중에"라는 예외적인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3장 12절의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4장 1절의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말씀과,
12장 15절의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우리"라는 대상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대상은 종종 가정법상의 우리로서 마치 구원받은 신자들도 멸망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장 9절에서는 "오직 우리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4장 3절에서는 2절의 "믿음을 화합치 않는" 사람들과 대조해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10장 39절에서는 "우리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함으로 "우리"라는 대상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너희에게"란 낱말은 히브리서를 수신하는 거듭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하여 6장 4-8절의 예외적인 대상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10장 .25절에는 구원이 아닌 상급에 대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구원얻지 못한 자의 묘사들
그러면 다시 히브리서에 나오는 구원얻지 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들 가운데 진실로 구원얻지 못한 자들이 끼어 있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2장 3절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3장 18절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던 자", 3장 19절에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6장 8절에서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자", 10장 25절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자", 12장 16절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법상의 "우리"
이번에는 "우리"란 말이 가정법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1장 8절을 보면 바울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절대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사도 바울 자신이나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전할 가능성을 내포한 말씀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에서도 "우리"라고 하여 참 거듭난 신자들을 포함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멸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내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버리면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히브리서 2장1-4절의 경고의 말씀을 깊이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말씀하신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8. 히브리서 6장 4 - 8절
저는 두 곳의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곳 집회에 참석했었습니다.
한 교도소는 수감자들의 수가 약 1000명 되는 곳이었고 다른 교도소는 약 5000명이나 되는 큰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듣고 본 후 수감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자극되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수감자들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로부터 중년, 청년 또한 부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이 큰 강당을 메우고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이 곧 사단의 희생자들임을 생각할 때 사단이 몹시도 저주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먼저 믿는 우리들이 그들을 사단의 쇠사슬로부터 풀어주는데 힘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리길 원합니다.
히브리서 13장 3절에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성정과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그러한 분들을 깊이 이해해 주지 못하고 냉대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 죄악에 빠져 불행해진 사람들을 건지는데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죄는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지만 그 죄인, 즉 죄인의 영혼은 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단과 죄의 사슬로부터 건져내도록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수감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분들을 건져줄 수 없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 예수님의 분부하신 바에 순종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곳 수감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전할 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이 실감났습니다.
실로 그러한 곳에서 주님께 굴복한 영혼에게는 은혜가 더욱 넘칠 것입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은 영혼이 기뻐 뛰며 주님을 찬미하며 공경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막 2:17)고 친히 말씀하신 자비하신 구주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먼저 믿는 우리는 수고로 씨를 뿌리고 그 결실을 내다 봅시다.
그 결실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죄와 사단의 노예가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며 주 예수님의 자비를 찬미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과 결실을 내다봅시다.
진리를 알고 배도하는 죄
앞장에 이어 히브리서 6장4-8절의 난해구절을 조금 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말씀이 구원받은 사람들도 타락하여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자세히 상고하면 히브리서만큼 신자의 구원의 영원성을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듯한 난해구절이 나오는 6장과 10장이 신자의 구원의 영원성을 더욱 확고히 증거하고 있음은 매우 놀랄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구원받은 히브리인들 중에는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섞여있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섞여있는 사람들을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함께 섞여 나와서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불순종하여 믿지않던 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고, 또한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로 비교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하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얻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본문의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경험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와 같은 경험을 하고서 그리스도를 떠나간 사람들의 예가 많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동안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선한 맛도 보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서 세상에 오실 임금이라는 사실에 비추임을 받기도 하고 또한 마음으로 크게 성령의 감화를 받기도 하고 또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가룟 유다도 그러했습니다.
셋째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발람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요한의 서신서나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대상과도 같은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구원
문맥상으로 보아도 8절에서 타락한 그 사람들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로 비유한 것을 보면 우리는 타락한 그 사람들의 근본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9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의 말씀(히 6:4-8)에 묘사된 사람들과 이 편지를 받는 참 구원얻은 히브리인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3-20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위안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함으로써 참 구원얻은 사람들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여 큰 위안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온전케 하심
이번에는 10장 26-29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위의 "우리"는 가정법상의 우리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알게 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짐짓 죄를 범했다는 것은 무슨 도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완전히 배반하는 배도의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구약의 에서와 발람이 그런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10장에서도 보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신자의 구원의 영원성을 확고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과 14절의 말씀을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배도의 죄는 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의식과 성전과 제사를 다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것을 위해서 땅의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이 닥쳐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 뒤로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결심했다가 끝내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직전에 안타깝게도 분명히 나타나 알게 된 진리를 배도한 경우가 된 것입니다.
이 때 히브리서 기자는 거듭난 경험이 없지만 배도하는 그들을 엄히 경고하고 또 구원얻은 성도들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게 하고자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6:10,11).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는가 하면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격려한 후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고 하였으며, 또 13장 12,13절에서는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을 깊이 묵상하심으로 마음에 빛을 받아 모든 죄와 불신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9. 야고보서 2장 14 - 26절
난해구절 중 야고보서 2장 14-26절의 말씀을 상고할 차례입니다.
우선 그 대목 중에서 핵심이 되는 14절과 2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실 이 말씀은 난해구절이라기 보다는 오해구절이라 불러야 더 옳을 것입니다.
아마 성경 전체에서 이 대목의 말씀만큼 가장 많이 곡해되고 또 오해되고 있는 말씀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많은 그룻된 신자들이 생겨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그릇 이해하므로써 영원히 멸망할 영혼들이 많이 있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변호할 때 강한 어조로 말하기를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스러운 진리를 잘못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한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행함으로 믿음을 대치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빼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행함이 곧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무 뿌리라면 행함은 그 열매이며 또 믿음이 영혼이라면 행함은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뿌리 없는 나무에서 열매가, 영혼이 없는 몸이 형성될 수 있습니까?
생명이 태어나면 기거동작하는 것이 있듯이 참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고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말로만 "주여, 주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에 언급된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이 사람 큰 "믿음이 있노라"과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그러면 이제 성경에 나타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를 규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로마서 3장 24절에는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둘째로 로마서 5장 1절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셋째로 로마서 5장 9절에는 우리가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넷째로 로마서 8장 33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다섯째로 야고보서 2장 24절에는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우리가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은혜와 믿음과 피와 하나님과 행위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즉, "은혜"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원칙이라면 "믿음"은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수단이며 "피"는 구주 예수님께서 그 의를 위하여 지불한 대가이며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의의 수여자이시며 "행위"는 의롭다함을 받은 증거 또는 결과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
다시 야고보서 2장 14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를 능히 구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열쇠가 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믿음이 있을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고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실제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믿음이 있노라고 하되 그 믿음을 증거하는 행위, 즉 생활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 그러한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무런 기식이 없다면 그 아이는 죽어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사람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생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써 구원받는다면 우리에게는 구주가 둘이 되는 셈입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시고 또 하나는 우리자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구세주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안 계심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행 4:12; 요14:6).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여 주여" 하는 입술만의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맺어지는 그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는 믿음의 열매이지 뿌리가 아닙니다. 행위는 구원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 사실에 대한 지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을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를 하나님께 의탁한 것이 없으므로 생활의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들이 앞으로 받을 형벌을 생각하고 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실로 주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 영과 혼과 몸을 전체로 의탁하게 됩니다.
이로 볼 때 행함이 없는 믿음의 원인은 머리로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확증됨
다음에 2장 21-25절에서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두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한 분은 유대인인 아브라함과 또한 사람은 이방여인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 말씀을 해설하기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창 15:6)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써(창 22장) 확증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 사실이 창세기 22장에서 진실한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는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는데 그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 믿음의 진실함을 입증하였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선행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받게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야고보서 2장 24절에 말씀한 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즉 24절의 말씀은 사람이 믿음과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실이 사람 앞에서 행위로써 증거 된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25절의 라합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분명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믿음으로 그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또 다른 길로 나가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겨 줌으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 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다고 증명하고자 합니다만 그들이 의미하는 선행은 자선이나 양심적으로 사는 것, 또한 교회 다니는 것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과 라합이 한 행동이 인간의 도리로 볼 때 선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자기 아들을 살해하고자 한 것이었고 라합의 경우는 자기 나라를 반역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행위에서 믿음을 뺀다면 그 행위는 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얻은 생명에서 난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행위로 받는다고 가르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살인과 반역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도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결론적으로 이상의 사실을 요약하여 말씀드린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용의가 있는가?
나는 라합과 같이 세상을 반역하고 그리스도께 충성할 용의가 있는가? 하는 등의 질문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0. 요한일서 5장 16절
요한일서 5방 16절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한 서신서의 목적
우리가 요한일서를 읽으면 사도 요한이 어떤 큰 문제를 의식하고 그 글을 썼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글은 매우 정확하고 단호하며 전혀 타협이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빛이 아니면 어두움이며, 생명이 아니면 사망이며, 참이 아니면 거짓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중간이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요한의 서신서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매우 필요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당시 경계하며 개탄해 하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 성도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와서 믿는 자로 자처하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부인하는, 미혹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2장 26절에서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 18절에서도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4장 1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이서 1장 7절에도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많은 거짓과 미혹이 역사하는 때에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참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미혹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그 거짓된 사람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주 당연한 이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겨 순종하기를 즐겨하고, 죄짓기를 계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장 6절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2장 4절에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2장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하셨으며, 3장 14,15절에서도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장 22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4장6절에 이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께 속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것은 1장 3절에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영적 사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진리 안에서 교제가 되고 안됨에 따라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귐은 곧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므로 매우 순결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이나 불의한 것이나 거역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뿐인 것입니다(롬 14:17).
우리는 이러한 사귐의 모범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도행전 2장 41-4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그 거울"에 자신들을 비추어 봄이 유익할 줄로 압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영생을 소유한 사람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자신에게 영생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질문으로 자신의 믿음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첫째로 나는 거듭난 성도들과 사귐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기름과 물처럼 마음으로부터 어울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당신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일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즐겨 순종하고 있는가?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한 성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셋째로 나는 죄를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싫어하고 있는가?
거듭난 신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죄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나는 거듭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이것은 교인을 사랑한다는 말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그러면 이제부터 난해구절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여기에 말씀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이 죄는 누가 범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이 사망이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지 그렇지 않으며 영혼의 멸망을 가리키는지 하는 것도 규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요한의 논법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귀의 자녀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경계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 두 부류의 다른 점을 자주 자주 동시에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2장 4,5절에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 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 을 아노라"고 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 2장 9,10절에서도,"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하여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3장 10절에서도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여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요일 3:9참조), 또는 의를 행치 아니하며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3장 13-15절, 4장 4-6절, 4장 7,8절, 4장 20,21절, 5장 12절 등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5장 16절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자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가 서로 다른 류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은 이 서신서에서 사망이란 낱말을 멸망의 의미로서는 사용하고 있어도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의미로서는 단 한번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사망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문맥상으로 볼 때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형제"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사망에 이른 죄를 말할 때에는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넷째로 사도 요한은 본 서신서에서 참 성도들과 거짓 형제들을 구약의 아벨과 가인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한쪽은 참이고 다른 쪽은 거짓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그러면 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이며 누가 범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코 참 거듭난 신자가 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죄는 지금 본 서신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미혹하는 자", 즉 "적 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아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그 죄입니다(요일 2:22,23).
그 당시에는 소위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이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무슨 뛰어난 지식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들의 말대로 무슨 뛰어난 영적 지식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망에 이른 죄요, 또한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 서신서 맨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 죄를 경계하여,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위해서
여러분,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영적 분별력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빛되신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못했거나, 또는 들어왔다 하더라도 진리를 순종하여 살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의 참 모습을 선명하게 볼 때까지 이 서신서를 몇 번이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1. 요한계시록 3장 1 - 6절
지금까지 난해구절의 해설에 대한 어려운 말씀들을 인내로 잘 읽어주신 데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이제 마지막 계시록 3장 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반드시 속히 될 일
계시록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써 그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신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인류역사의 최후의 모습, 즉 첫 창조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는 장엄한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성취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만유 안에서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쉽게 말씀드려서 1장 1절에 말씀하고 있는대로 앞으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장차 세계가 어떻게 것이라고 하며 유토피아적 세계를 구상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의 전전긍긍하는 현실로만 보아서도 그것은 기대하기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계시록은 장래의 세계를 암담하게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인간의 급속한 도덕적 타락과 세계적 핵전쟁의 위협, 해마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세계적 기근 현상,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 지진 현상, 또 그로 인해서 만연할 전염병 등을 고려할 때 너무나 틀림없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이와 같이 앞으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예언하고있는 책이므로 성도는 물론 누구나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1장 3절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계시록을 읽으십시오.
읽으실 뿐 아니라 거기에 기록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받으실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이 "회개하라"고 말씀하면 회개하시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면 죽도록 충성하시고, 또 "굳게 잡고 있으라"고 하면 굳게 잡고 있으십시오.
일곱 편지와 교회 역사
그러면 이제 난해구절이 나오고 있는 3장 1-6절의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횐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횐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낸 일곱 편지를 보게되는데 이 편지들은 다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산재해 있던 실제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곱 편지는 교회 역사상의 일곱 기간을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첫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실 때에 그 교회의 영적 상태만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주후 1세기의 전반적인 교회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두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는 주후 2세기와 3세기의 박해당할 교회시대를 미리 말씀한 것입니다.
세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는 주후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세상권세와 타협한 교회시대를 말씀한 것입니다.
네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는 주후 6세기에서 15세기의 종교개혁 때까지의 암흑시대, 즉 이교도화 된 로마 카톨릭 교회시대를 말씀한 것입니다.
다섯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는 주후 15세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개신교 시대를 말씀한 것입니다.
여섯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후 1800년대의 전 세계적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형제사랑으로 뭉친 교회시대를 말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번째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의를 상실한 마지막 때의 교회 시대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 일곱 편지의 내용이 교회 역사의 그 일곱 기간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사실은 정말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식주의의 개혁교회
이제 우리가 상고할 사데 교회는 교회 역사의 제 5시간에 속하는 것으로 "사데"란 말은 "남은 자" 혹은 "개혁"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데 교회는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을 대표로 하는 이교도화된 로마 카톨릭의 "교훈"을 받지 않고(계 2:24) 그들을 피하여 남은 자, 곧 마틴 루터와 죤 칼빈, 위클리프 등등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개혁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와 같이 중세 암흑시대를 거쳐오는 동안에 거의 그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그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소수의 충성된 종들에 의해서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교회들 마저도 주님께서 3장 1절에서 지적하신 대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하신 생명없는 형식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서 칭찬할 만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처음부터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형식은 있는데 마음은 떠난 것입니다.
말로는 그리스도를 시인하면서도 행동으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얼마나 아연실색케 하며 놀랄만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보시는 개혁교회들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대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늘날의 개신교회들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권면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3:1)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개혁교회에 지금 남아 있는 그 전통적인 교리마저도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개혁교회 안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심지어는 우리 주님의 신성, 동정녀 탄생, 기적, 몸 부활, 완전구속, 주님의 재림 등의 복스러운 진리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으로부터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일깨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절에는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말씀입니다.
도적같이 임하시는 주님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거듭난 신자들과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형식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형식주의자들에게 도적과 같이 이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적같이 임하시는 주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오시는 "공중재림"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4,5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들은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은 그 남은바 죽게된 것을 일깨워 회개하라는 말씀에도 주의하지 않으며 또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리도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도적과 같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
그러면 여러분의 현 처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4,5절에 보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와 "이기는 자"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참 믿음을 가진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긴다는 말씀이겠습니까?
그것은 개혁교회의 형식적인 생활을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생활을 이겨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구원받았더라도 끝까지 참아 이기지 못한다면 그 얻은바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구원의 영원성을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다른 많은 말씀과 틀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5장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멸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는 본문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재 확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위협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계시록 13장 8절이나 17장 8절을 보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20장 11-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씀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와 "불못"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이름은 틀림없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불못에 던지운다는 이 두려운 사실을 생각하고 어서 빨리 자신을 낮추어 회개하시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