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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

[스크랩] ☞ 당신의 확신을 강요하지 말라 / 정원 목사

아 푸른하늘 2010. 7. 1. 15:38
대체로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확신이 많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확신이 많은 경우에 평화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별로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때가 많다.

어느 날 어떤 청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청년이 바로 그렇게 확신이 많은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목사님.. 이제 주님 오실 날이 아주 가까워졌어요. 정말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형제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이나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형제였다.
나는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왜 주님이 아주 가까운 날에 오신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하지요. 성경에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이 되는 날에 안식을 하셨잖아요.
지금 세계의 역사가 6천년이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7일이 되는 7 천년 때부터는 천년 왕국이 시작되는 데 그 전에 먼저 환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란도 주님의 재림도 아주 가까워졌지요."

나는 형제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형제가 하는 이야기는 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에 근거한 이론이예요.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6천년이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 절대적인 진리라고 볼 수는 없어요. 형제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믿고 있나 보지요?"
형제는 선뜻 대답했다.
"물론 믿지요. 전천년설이 성경적입니다."

독자들에게 조금 따분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그리고 전천년설에는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있다. 그래서 합치면 네 가지의 견해이다.
별로 재미도 없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나는 계속 질문을 했다.
"전천년설이 성경적이라면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은 잘못된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천년설이 성경적이라는 것이 성경의 어디에 분명하게 쓰여져 있나요?"
형제는 조금 주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흔들리지 않고 그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확신을 흔들기 시작했다.
"형제.. 형제는 전천년설에 대한 형제의 확신에 형제의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만약에 전천년설이 틀린다면 나는 지옥에 가도 좋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한번 더 묻지요. 그 전천년설을 위해서 형제의 삶을 걸 수 있나요? 다시 말하자면 형제는 그 원리,
전천년설을 위하여 살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이고.. 뭐,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가지만 더 묻지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형제가 전천년설이 옳다고 믿게 된 동기는 형제가
오랜 시간동안에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여러 관련 서적이나 논문 등을 살펴보고 그 결과로
그것이 옳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인가요?"
그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사실은.. 후자입니다."

나는 그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형제님.. 그렇다면.. 형제가 그렇게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목숨을 걸 정도도
아니라면 그렇게 함부로 너무 확신있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함부로 남들을 마귀취급 하지도 마세요.
그러한 것들은 지엽적인 것들이고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천년설보다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 형제는 순진하기는 했지만 툭하면 자기와 견해가 다른 이들을 마귀 취급하고 정죄를 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금 준엄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왜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대수롭게 여기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을까?
그것은 아마 그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이들에게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에 청년 시절에 교사를 하던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담당 목사님께 교리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칼빈주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예정론이 얼마나 바른 것이며 진리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열심히 배웠는데 어떤 나이 지긋하신
남자 집사님이 목사님께 질문을 했다.
"목사님.. 그렇다면 그와 반대를 가르치는 감리교는 이단이 아닙니까?"
젊은 목사님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렇지요."

감리교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고 배웠다.
그 젊은 목사님의 견해가 장로교의 대표적인 입장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자기의 신조에
대해서 목숨을 거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젊고 유능한 침례교의 목회자를 기억한다.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침례를 안주고 세례를 줄 수가 있어요?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는 훌륭하고 열정적인 사역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침례에 대하여 자부감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대해서 비양심적인 것으로 모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천년왕국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아직도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무천년주의자로 유명하신 목사님과 전천년주의자로 유명하신 목사님이 글로써 논쟁을 한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두분 다 신학적으로 무게가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을 하면서 읽어도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분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고 원어를 인용하고 해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시키려고
노력을 하는데 한 분의 말을 들으면 그쪽이 옳아 보였고 다음 순간에 다른 분이 반박을 하면
또 그쪽이 옳아 보였다.
결국 나는 둘 다 옳은가보다고 생각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되는 것은 어떤 계기에서일까..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이나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대체로는 그가 소속하고 처한 곳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서 어떤 성도가 교회를 정할 때 집에서 장로교회가 가깝고 그 교회에 가보니 말씀도 좋고
분위기도 은혜스러워서 그 교회에 등록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장로교인이 된다.
그것은 그 교회가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지 그가 감리교의 예지예정설보다 장로교의 예정설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칼빈주의 5대교리와 알미니안 주의 의 교리를 꼼꼼하게 비교해보고 나서
교회를 선택하는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부인이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전천년설이 옳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렇게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어렸을 때에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는 아주 확실한 것이겠지만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왔다고 하자.
그가 만약 달라스 신학교를 나왔다면 그는 아마 자신을 전천년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학을 나왔다면 자신을 무천년설주의자라고 여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어디에 소속되고 어디에 영향을 받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졌지만 나는 사실 이러한 이야기가 싫다.
복잡하기 때문에 귀찮다.
어떤 분들은 요한 계시록이나 말세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잘 모른다.

요한 계시록에는 풍부한 상징과 비유가 있어서 정말 많은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해석도 문제가 없는 것은 없다.
전체의 분위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부적인 의미와 비유에 대해서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성경의 모든 주석을 쓰신 칼빈 선생이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

성경에는 모를 것이 참 많다. 어떤 이들은 참 알아먹기 어려운 난해한 질문을 하는 것을 즐겨서
사역자들을 골탕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성경에는 우리가 모를 것도 많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 알려져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우리는 전심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가족들에게 잘해주어야 한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영원한 것들을 더 사랑하고 추구하라는 것,
남에게 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고 잘해주라는 말씀.. 등등 우리가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알고 있는 것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분명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미워하고
파를 만들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을 비난해야 하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난해하고 알기 어려운 새로운 지식을 깨닫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오늘날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많다.
확신이란 좋은 것이다.
그 확신이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그 확신을 가지고 남을 정죄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과 용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하며 서로에 대해서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한 것들이 지엽적인 의견의 차이보다 중요하다. 누가 더 옳은지를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견해가 틀리다고 서로에 대해서 마음을 닫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사랑이 많고 따뜻한 사람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좀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열려져 가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싸움이 아니다.

단순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단순해져 갈 때에 우리는 좀 더 자유롭고 풍성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지며 우리는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글쓴이 : 차니미니파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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