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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타종교

[스크랩] 기독교와 불교의 인과사상(因果思想)

아 푸른하늘 2013. 7. 19. 11:09

 

기독교와 불교의 인과사상(因果思想)

-구약성경과 아함경에 나타난 인과사상을 중심으로-

 

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1. 용어에 대한 정의

 

 

(1) 인과(因果)

 

‘인과’(因果)라는 용어에서 인(因)은 ‘어떤 현상보다 먼저 일어나 그것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작용)’을 의미하고, 과(果)는 ‘어떤 원인(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결과(반응)’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과란 ‘원인과 그에 대한 결과’, 또는 ‘작용과 그에 대한 반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과율’(因果律)이란 ‘작용(원인)과 반응(결과) 사이의 관계성(법칙성)’을 의미한다.

 

 

(2) 응보(應報)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응보’(應報)에 해당하는 영어의 retribution은 라틴어 어근 retribuere가 지니고 있는 ‘다시 주다, 갚다, 보복하다, 보상하다’ 등의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응보(retribution)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용어가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응보’라는 용어는 ‘인간이 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고락의 과보’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인과응보’라는 용어는 ‘선한 인(因)에는 좋은 과(果)가, 악한 因에는 나쁜 果가 상응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3) 업보(業報)

 

‘업’(業, karma)이라는 용어는 ‘만들다’를 어원으로 하는 개념이고, ‘작용’, ‘일’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報, vip?ka)는 ‘성숙함’을 의미한다. 이 두 용어는 불교에서 쓰이기 전부터 우파니샤드 철학과 같은 인도 사상계에서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타마 싯닫타는 이 두 용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업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선악의 업에 의하여 받는 고락의 과보’를 뜻한다.

 

 

 

2.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과사상(因果思想)

 

 

(1) 인과의 법칙성(法則性)

 

(a)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의 대원칙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에게 福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罰을 내리신다’(賞善罰惡)는 것이다.

 

이러한 응보의 원칙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구약성서에서 응보사상은 역사전개의 원리이자 역사해석의 밑바탕이 된다.

 

신명기사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킬 때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계약을 잘 지키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 무거운 벌을 내리시고 심할 경우에는 국가를 멸망시키기까지 한다는 응보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는 ‘타락(하나님과의 계약 불이행, 범죄, 배신)→고난(하나님의 심판, 징벌)→이스라엘의 회개→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반복적인 역사의 순환이 나타난다. 신명기사가는 그의 역사서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그 죄인이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죄인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역대기사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신명기사가보다 더 철저하게 응보원리를 적용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되는 경우가 므낫세사이다. 므낫세는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5년간이라는 장기간 동안 통치하였다. 역대기사가는 므낫세가 즉위 초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가 앗시리아의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뒤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였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므낫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있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기사가 역시 죄인으로 하여금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b) 賞善罰惡의 응보법칙이 모든 경우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악을 행한 죄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먼저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 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果, 또는 ② 제3자로부터 오는 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욥의 고난은 그의 신앙의 신실성을 증거하기 위한 시험에서 비롯된 고난이었다(①의 경우). 그리고 예레미야 8장 21절에 나타난 예레미야 예언자의 歎息은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고난이었으며,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종의 고난은 타인의 죄에 대한 대속의 고난이었다(②의 경우).

 

한편, 인간이 죄악을 범하고도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는 경우로는

①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경우,

② 죄인이 속죄제 또는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리거나,

③ 제3자가 죄 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죄를 지은 자에게 죄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罰이 내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록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악인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 한 예로 신명기사가와 역대기사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환난에 처했을 경우, 그들이 진실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레위기 4장 1절-5장 13절에서는 속죄제 규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레위기 5장 14절-6장 7절과 7장 1-10절에서는 속건제 규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 5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였으므로 자신들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치유를 받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c) 이와 같이 賞善罰惡의 인과사상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응보의 원칙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욥의 고난이나 하나님의 종의 고난처럼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賞善罰惡의 전통적인 인과율의 범주를 벗어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단정적으로 확정짓기는 쉽지 않다. 욥의 이야기에서, 욥이 겪는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인 성실성을 증거하기 위한 시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충성됨을 굽히지 않고 고난을 이긴 욥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내려주셨음은 ‘義人이 福을 받는다’는 구약의 지배적인 개념을 다시 확증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他人의 죄를 代贖하기 위하여 겪는 종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惡한 자에게 罰을 내리신다’는 응보교리를 대전제로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또한 惡人이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는 경우 역시 전통적인 應報敎理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 속죄제, 속건제, 또는 제 3자의 대속 등 하나님의 징벌이 죄인에게 내리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惡人에게 罰을 내리신다”는 응보사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2) 인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의 관점에서 어떤 행위나 현상을 바라볼 때 그 행위나 현상이 因이냐, 果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 어떤 행위나 현상의 경우에는 단독적으로 因이나 果로서 확연히 구분 된다기보다 因이면서 동시에 果가 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因은 果를 내포하고 있고, 果는 因을 내포하고 있다.

 

역대기하 33장에 나타난 므낫세이야기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역대기사가는 므낫세가 즉위 초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앗시리아의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뒤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 列祖의 하나님께 겸비하여 기도한 故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며 간구를 들으셔서 므낫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있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11-13절).

 

이 부분을 因果의 큰 줄기에서 고찰할 때 므낫세의 악행은 因이 되고 그가 포로로 잡혀감은 果가 되며, 그의 포로지에서의 회개는 因이 되고 그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왕위에 있게 됨은 果가 된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때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므낫세가 회개를 하게 된 근본적인 까닭은 그가 악행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므낫세가 회개를 하게 된 근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회개는 자신의 악행(因)에 대한 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종의 고난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인과의 복합적인 양상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종의 고난은 因이면서 동시에 果가 된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의 相依相關的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현재적 행위가 때로는 과거의 果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因이 될 수도 있다.

 

 

(3) 인과율(因果律)의 주체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율의 주체는 선악의 행위를 하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인간의 모든 행위에 干與하신다. 전통적인 응보사상에서나 응보사상의 범주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는 인과교리에서나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4) 기독교사상 전반에 있어서 구약성서의 인과교리가 차지하는 위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가 기독교사상 전반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인과교리가 서로 부합하는가의 여부를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賞善罰惡의 응보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와 善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큰 賞을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였다(눅 6:35-38). 그리고 이러한 선포의 한 쪽에는 惡人에게 징벌이 내릴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참조. 마 18:35). 마태복음 25:46에는 “不義한 자들은 永罰에, 義人들은 永生에 들어가리라”는 종말론적 심판관이 나타난다. 이러한 개념은 신약성서에 두루 나타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6:6에는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에 福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인과원칙이 신약성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전통적인 응보사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因果의 모습을 신약성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대속의 고난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심이며, 그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롬 3:23-24)고 이르고 있다. 히브리서 2:9에서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대속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의 죄를 代贖한다는 점에서 볼 때,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종의 고난은 相通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라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빌 1:29), “의를 위하여”(벧전 3:1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살후 1:5), “복음을 위하여”(딤후 2:9), “사탄에게 대적하기 위하여”(벧전 5:9), “그리스도인으로서”(벧전 4:16),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행 5:41)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난은 욥이 강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신실성을 증거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염려하면서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고후 2:4) 편지를 썼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고난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가 상치(相馳)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타우너(W. S. Towner)는 구약성서의 응보개념이 초대기독교에 종말론적 형태로 전달되었으며, 이러한 종말론적 개념이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구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인과교리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3. 불교 아함경(阿含經)에 나타난 인과사상

 

(1) 인과의 법칙성

 

(a) 업설(業說)의 인과율(因果律)

 

아함경에서는 업(業, 행위)과 과보(果報)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도 동일성을 띤다고 말한다. 즉 업인(業因)이 선하면 과보도 선하고 업인이 악하면 과보도 악한 성질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업에는 과보가 없다고 말한다.

 

한편 ‘인간의 의지가 작용한 업’(有故作業)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르지만,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은 업’(不故作業)에는 과보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업설에서 보는 선악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善業이고, 무엇이 惡業인가? 아함경에서 열 가지 惡業과 열 가지 善業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를 ‘十業說’이라고 부른다.

 

 

(b) 십업설(十業說)

 

아함경에서는 業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즉 ‘몸으로 짓는 업’(身業), ‘입으로 짓는 업’(口業), 그리고 ‘의지(마음)로 짓는 업’(意業)을 말하고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身, 口, 意 三業이 서로 비슷하지만 이 가운데 意業이 무거운 것이라고 가르쳤다.

 

한편, 업을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의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思業은 마음으로 짓는 업으로 意業을 가리키고, 思已業은 마음으로 앞서 행한 후 입이나 몸으로 짓는 업으로 身, 口 二業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함경에서는 身, 口, 意 삼업을 세분화하여 열 가지 악업과 열 가지 선업을 말하고 있다.

 

십악업(十惡業)이란 살생(殺生), 도둑질(不與取, 偸盜), 그릇된 음행(邪淫), 거짓말(妄語),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兩說), 추하고 악한 말(醜言, 惡口), 꾸며내서 하는 말(綺語), 탐욕, 성냄, 그릇된 생각(邪見)의 말한다.

 

그리고 그 반대개념으로 십악업에 부정접두사 ‘不’ 또는 ‘無’를 붙여서 십선업(十善業)이라고 한다. 不殺生(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을 放生(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不偸盜(도둑질 하지 않는 것)를 布施(베푸는 것)로 표현하는 것처럼 십선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십업설에서는 열 가지 악업을 먼저 말하여 사회윤리적인 악의 소멸을 강조한 다음, 십악업의 반대개념으로 십선업을 말하여 선을 권장하고 있다.십악업과 십선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십악업과 십선업

구 분

十惡業

十善業

 

身業

殺生, 偸盜, 邪淫

不殺生, 不偸盜, 不邪淫

口業

妄語, 兩說, 惡口, 綺語

不妄語, 不說, 不惡口, 不綺語

意業

貪, 瞋, 癡

無貪, 無恚, 無癡

 

위 표에서 보듯 십업설에는 사회윤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유 없는 행복도 없고, 이유 없는 고난도 없다. 행복한 삶은 선업의 과보이고, 고통스러운 삶은 악업의 과보이다. 이러한 인과율이 현실세계의 실상에 부합되지 않는 문제점을 업설에서는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시기로써 풀어가고 있다. 이것이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이다.

 

 

(c)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

 

현실세계를 관찰할 때, 업과 과보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현재 나타난 과보에 대한 業因을 알 수 있는 경우

② 현재 과보는 있는데 그 業因을 알 수 없는 경우

③ 현재 業因은 있는데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

 

‘선한 업에는 좋은 과보가 따르고, 악한 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것은 ②와 ③의 경우이다. 이 두 경우를 아함경에서는 인과응보가 전생-현생-내생의 삼 세에 걸쳐 전개된다는 삼세업보설로 설명한다. 즉, ②의 경우는 그 업인(業因)이 전생에 있었다고 보고, ③의 경우는 그 과보가 내세에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아함경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작용한 업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따르는데,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함경의 업설은 이와 같이 삼세업보설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짓는 선악의 업에 따라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人), 천(天)의 여섯 세계를 윤회한다고 가르치는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d)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

 

육도의 ‘도’(道, gati)는 ‘취’(趣)라고도 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뜻하고, 육도란 업에 따라 가게 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 천의 여섯 세계를 말한다. 육도에서 앞의 셋을 선업에 대한 선취(善趣)라 하고, 뒤의 셋을 악업에 대한 악취(惡趣)라고 한다. 한편 경전에 따라 선취로서 아수라 대신 열반을 넣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업설의 인과교리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아함경에 나타난 인과교리의 대원칙은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율이다. 아함경에서는 이 인과율이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2) 인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아함경의 인과교리는 연기론적으로 전개된다. 인간의 현실은 과거의 업에 대한 果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果에 대한 因의 성질을 띤다고 말한다. 즉,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일어나면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緣)이 되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함경의 인과교리에서는 모든 현상과 존재가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라는 인과의 상의상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3) 인과율의 주체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는 현실세계의 중심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아함경의 교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함경의 인과교리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함경에서 말하는 인과율의 주체는 행위를 하는 인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4) 불교사상 전반에 있어서 아함경의 인과교리가 차지하는 위치

 

아함경의 인과교리에서 볼 때,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이러한 인과교리는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이라는 불교 교설의 두 가지 체계 가운데 자력문의 교설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타력문의 교설에서 인간의 현실을 바라보는 입장은 아함경의 인과교리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입장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대승불교에 속하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죄업심중(罪業深重)하고 번뇌치성(煩惱熾盛)한 존재이다. 정토신앙은 대승불교 초기에 인도에서 일어났는데, 인간이 이성(理性)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절대타자인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해서만 구제(救濟)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미타불의 본원력 구제설은 유신론적인 종교 사상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에 대해 인도학을 전공한 일본학자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는 아미타불의 타력본원(他力本願) 사상이 분명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정토신앙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타력본원 사상과 인도에 옛날부터 있었던 낙토사상(樂土思想)을 혼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 『불교, 그 세계』 pp. 182-83.)

 

미륵신앙(彌勒信仰)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힘에 의하기 보다는 절대타자인 미륵불의 힘에 의해서 구제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서는 인간이 미륵불을 믿고 의지할 때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서는 미륵불이 도솔천으로부터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관음신앙(觀音信仰)에서도 타력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독립시켜 관음경(觀音經)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이 현실세계의 가지가지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타력문 교설에서는 절대타자의 힘에 의한 인간의 구제를 말하고 있다. 아무리 죄업이 무거운 인간이라 할지라도 절대타자인 아미타불, 미륵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본원력에 의해 구제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전반적인 인과교리에 있어서 아함경의 인과교리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야경(般若經)과 화엄경(華嚴經) 등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지도론(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십지경론(十地經論),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 등 여러 대승경론에서 아함경의 십업도론(十業道論)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원시불교의 십업설이 대승불교에 있어서도 윤리사상의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4. 구약성경과 아함경에 나타난 인과사상에 대한 비교

 

 

(1) 인과율의 주체

 

구약성경의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아함경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인과사상 역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 중심으로 전개되고, 아함경에서는 인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구약성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선악을 판단하시고 賞善罰惡을 주관하신다. 반면에 아함경에서 볼 때 연기법에 의하여 선악의 업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있게 된다. 즉 구약성경에서 인과율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아함경에서 인과율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다.

 

 

(2) 선악의 평가기준

 

구약성경에서는 선행과 악행을 평가함에 있어서 대신관계(對神關係)와 대인관계(對人關係)의 두 가지 평가기준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 전반에 나타난 인과사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는 것은 선에 속하였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악에 속하였다(대신관계 평가기준). 그리고 약자를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것은 선에 속하였으며, 반대로 약자를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악에 속하였다(대인관계 평가기준).

아함경에서는 선업과 악업을 평가함에 있어서 사회윤리적인 측면을 많이 고려하고 있다. 아함의 인과사상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사회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선에 속하고, 반대로 사회에 해로움을 끼치게 되는 것은 악에 속한다. 따라서 아함경의 인과사상에서는 대인관계 평가기준 한 가지만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3) 인과의 법칙성

 

(a) 인과율의 대원칙

 

구약성경과 아함경에서는 양쪽 모두 인과율의 대원칙으로 ‘善因에는 善果가 따르고, 惡因에는 惡果가 따른다’는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사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율이 주변의 현실과 항상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삶과 符合되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는 구약성경과 아함경의 관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罪를 짓지 않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와 惡人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두 인과사상의 관점을 비교하여 보자.

 

(b) 의인(義人)의 수난 가능성

 

구약성경에서는 고난을 ①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로서의 果, ②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果, 또는 ③ 제3자로부터 오는 果로 분석한다. 구약성경에서는 ②와 ③의 경우처럼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에게도 고난이 임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반면에 아함경에서는 惡因이 없는 고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다. 즉 일체의 고난을 예외없이 자신이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로 분석한다. 현세의 삶을 착하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까닭은 전생에 악업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c) 악인(惡人)이 고통스러운 과보를 면제받을 수 있는 가능성

 

우리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惡人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경우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① 죄인이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간구하므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는 경우.

②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제나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는 경우.

③ 자신의 죄를 제3자가 대속하는 경우.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죄인이 하나님의 징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아함경에서는 악인이 惡果를 면제받을 수 있는 경우를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인이 苦果를 면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현재 악인이 고난을 당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은 전생에 지은 善因에 따르는 善果이며, 현세의 惡因에 대한 惡果를 현세의 남은 생애 동안이나 내세에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대승불교의 타력문 교설에서는 절대타자의 힘에 의한 인간의 救濟를 말하고 있다.

 

 

(4) 인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인과사상의 관점에서 어떤 행위나 현상을 관찰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단독적으로 因이나 果로서 확연히 구분 된다기보다 果이면서 동시에 因이 되는 상의상관성을 보이고 있다. 즉 因은 果를 내포하고 있고, 果는 因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의 고난의 경우에는 인과의 상의상관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종이 당한 고난은 果이면서 동시에 因이 된다. 아함경의 인과사상에서도 현재의 행위나 현상이 과거의 因에 대한 果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果에 대한 因의 성질을 띤다고 말한다. 즉,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일어나면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원인이 되고 緣이 되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5) 因과 果의 존재 시기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받고 있는 果의 因은 현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현세의 범주 안에 존재하되, 가까이 있을 수도 있고 멀리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 행하는 因의 果를 받는 시기는 현세 또는 내세가 될 것이다.

 

아함경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받고 있는 果의 因의 존재하는 시기는 전생 또는 현세이다. 그리고 현재 짓고 있는 因의 果를 받는 시기는 현세 또는 내세가 될 것이다.

 

 

 

5. 맺는 말

 

(1) 구약성경의 인과사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전개된다.

(2) 아함경에 나타난 인과사상은 인간 중심으로 전개된다.

(3) 구약성경과 아함경의 인과사상 사이에는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많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인과사상과 아함경의 인과사상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나타난다.

①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억제시키고 있다.

② 양쪽 모두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③ 양쪽에 다 같이 인과의 상의상관성이 나타난다.

 

구약성경과 아함경의 인과사상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①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과율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아함경에 나타난 인과율의 주체는 인간자신이다.

② 선악의 평가기준으로 구약성경에서는 대신관계와 대인관계의 두 가지 평가기준을 사용하고 있으나, 아함경에서는 대인관계 평가기준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

③ 구약성경에서는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의 수난 가능성과 惡人이 회개 또는 제3자의 대속 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면제받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함경에서는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율이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④ 구약성경에서는 인과법칙이 현세와 내세에 걸쳐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아함경에서는 인과법칙이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에 걸쳐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의 출전

임헌준, 『아는 만큼 보인다』(서울: 쿰란출판사, 2005), pp. 123-145.

 

기독교와 불교의 인과사상.pdf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8340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8409

 

 

출처 :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글쓴이 : 임헌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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