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 키우기
[스크랩] 체험 본문
역경 체험으로
헬렌켈러 가정교사 자기가 소경이었다 9번 수술로 시력회복 그래서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헬렌을 불쌍히 여겨 포기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떠게 해 주었다. (고후1:3- )
체험의 재산
현인(賢人)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삶의 의미 를 배울 수 있겠죠?』
스승은 고개를 흔들며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스승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비웃으며 떠났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실망하자 賢人은 말했다.
『너희가 삶의 본질과 의미를 맛본 적이 없다면 그걸 이해해서 무엇하겠느냐? 나는 너희가 요리를 보고 사색하기보다 요리를 먹기를 바란다』
고통의 체험들이 찬송의 원료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유럽에서 발발한 30년 전쟁으로 열두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2년 후 어머니마저 여의고 고아가 됐다.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그는 신학대학에 진학했으나 경제난과 건강악화로 14년만에 학교를 졸업했다.목사가 돼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다.이로 인해 아내와 네 자녀를 잃었다.사람들은 그를 ‘비극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그러나 그는 숱한 시련을 통해 신앙의 깊은 곳으로 인도됐다.그리고 고통의 편린들을 모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폴 게어하트.찬송가 18장 ‘내 영혼아 곧 깨어’를 작곡한 독일의 찬양시인이다.고통의 체험들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찬송의 원료가 된 것이다.하나님은 가끔 자신이 빛임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을 어둠 속에 두기도 한다.
플라벨의 주님임재 체험
플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바로 서있는 칼빈주의자였으며 평신도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타고 한참 가는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감당할수 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점점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급기야는 말을 타고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잠잠하니까 말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플라벨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자기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말을 몰지 않으니까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나무에 찔려 플라벨의 얼굴이 찢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내려와서 얼굴을 씻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그때의 느낌을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내가 말등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던 그 순간이 천국이 아니었다면 설혹 다른 곳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그것만큼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은혜스러운 날 저녁에 플라벨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 잡았던 것입니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혀 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그가 기록하기를 `나는 어느날 밤보다도 그곳에서 잔 그날 밤만큼 푹 쉰날이 없었다. 그전에는 생전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내 영혼이 믿음으로 보고들은 밤이었다.`라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런 것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체험이 없었던 목사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진실한 복음적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고 회의와 번뇌에 싸여 우울하게 지내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어느날 동네교회의 학문적으로 식견이 높다는 목사님을 찾아가 "저는 교회를 다니는 데도 불구하고 제 마음 속에서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대곤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때문인가요?" 하고 자기의 심중을 털어 놓았더니 그 목사는 한 마디로 "아마 그런가보군요"하였다
젊은이는 목사의 대답에 충격을 받고 실망에 실망을 더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복음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이 젊은이가 자기 친구에게 "옛날 그 목사님은 아마 신학적으로는 밝은지 모르겠지만 악마와 싸워본 경험이 없었나보다"라고 하였다. 신앙상의 경험은 이미 지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