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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생명의 속전이 무엇인가? 본문
역대상 21장은 다윗이 사단에 넘어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인구조사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인구조사는 다윗의 불신앙적인 행위로서 왕국의 안전과 번영은 사람의 역량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있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습니다. 다윗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이 통치하는 왕국의 규모를 파악하여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려는 교만과 오만의 죄에 빠진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인구조사 명령을 내립니다. 요압이 누구입니까?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잔인하고 간사하며 광포와 교활함이 가득찬 사람인데, 이 요압조차도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요압이 가로되 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하나 다윗이 요압을 제촉한지라.』 사무엘하 24장에서는 이 인구조사가 무려 9개월 20일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요압의 보고에는 레위와 베냐민 사람을 빼고도 칼을 뺄만한 자가 무려 157만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다윗은 중대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인구조사는 원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거룩한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생명의 속건제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세도록 하신 거룩한 의미가 있는 이 인구조사를 다윗은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추락시킨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심판은 극도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선지지 갓이 다윗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옛날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했던 청년시절의 다윗에게 나타났던 갓 선지자가 이제는 왕이 되었으나 인생의 황혼녘에 도달한 다윗에게 나타나 여호와의 심판을 알려줍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이 내려 7만명의 백성이 죽게됩니다.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다윗다운 태도가 나타납니다.
본문 16-17절에 다윗은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여호와께 통회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다윗의 겸허한 태도는 17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통회합니다.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자는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다윗은 자기가 행한 것을 사소하게 생각하거나 자기 행동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범한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왕이 아니라 통회하는 범죄자로서 베를 입고서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족했습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통회하는 다윗에게 용서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통회하는 다윗에게 그 즉시, 바로 그 장소에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추측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하여 한가지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브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드디어 오늘 말씀의 제목인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통회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명령하십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가라 그곳에서 단을 쌓으라』 무슨 의미이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과연 어떤 곳이란 말입니까?
오르난의 타작마당
우리는 바로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천년간을 꿰 뚫으시는 하나님의 절묘하고 놀라운 계시를 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천년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여호와께서 지시한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아브라함이 답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이삭이 말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기막힌 장면이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결국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하고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으려고 이삭을 누였던 곳이, 바로 그 장소가 천년이 흐른 뒤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의 한 지점이 천년이 흐르면서 그곳은 이방 가나안 족속인 여브스 족속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이제는 오르난이라는 여브스 사람의 곡식을 털게하는 타작마당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여호와께서는 지적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의 번제를 성도의 최고봉이며,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형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장소를 하나님은 지적하시면서 다윗이 통회할 구체적인 장소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장소를 지정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오르난에게 갑니다. 오르난은 왕의 행차에 놀라고 자기의 타작마당에 단을 쌓겠다고 왕인 다윗이 말하자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합니다. 『왕이여 마음대로 취하십시오. 소들은 번제로 쓰시고 곡식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쓰시고 밀은 소제물로 다 쓰소서!』 그러나 다윗은 오르난의 무상공급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다윗의 이말을 최고의 종교적인 원리라고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곧 24절의 말입니다.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바로 이 다윗의 정신입니다. 26절에 여호와께서는 불로서 그 번제단에 응답하십니다. 천국은 남의 신앙이나 남의 믿음으로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금 육백 세겔을 주고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 천년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장소를, 다윗은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자기 죄를 통회하는 구체적인 장소로 다시 회복시켰으며, 바로 이 장소는 훗날 아들 솔로몬이 여호와께, 바로 그 유명한 솔로몬 성전을 지어 바친 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대하 3장 1절의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브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너무도 숙연하며 몸이 오싹할 정도의 일치가 아닙니까?
인구조사에 따른 생명의 속전 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 자신의 영예와 막강한 국방력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떠난 자만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다윗과 백성을 각성 시키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이 일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했을 때, 하나님은 세 가지 징벌을 제시하면서 그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온역으로 칠만명이 죽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칠만명을 죽이셨을까요? 출애굽기 30장 12절~15절에서도 인구 조사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기 쉽고, 혹은 각자가 직접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자기 죄와 더러운 것이 하나님 앞에 폭로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속전으로서 은 반 세겔을 하나님에게 받치는 행위입니다. 다윗도 죄가 있지만 당시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가 인구조사 할때는 속전의 반세겔 드리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때문에 속전의 반세겔때문에 칠만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약에 인구조사를 하여도 출애굽기 30장에 있는 생명의 속전을 드렸다면 온역을 맞지않았을 것이고 다윗왕의 역임중에 큰죄가운데 기록되지않았을 수 도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예수로 오셔서 인류를 위한 속전으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십자가 제단에 어린양을 드림으로 인류에게 생명의 속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계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누가 당신의 백성인가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 마음의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음받은 자, 거룩하게 된 의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은 거듭난 사람의 수를 말해야 되는 겁니다. 교인의 숫자야 수백만 명, 일천만 명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일천만명 정도 된다면 대한민국은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만 정확하게 들어가서 구원받은 성도가 많이 일어나게 되면 사회 정화는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속전이 지불되어서 구속함을 입고 하나님의 거룩한 피로 택한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참된 성전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거예요. 누구든지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속전의 의미입니다. 속전 없는 복음은 죽은 복음입니다. 속전이 빠진 복음은 부활의 생명이 없는 죽은 복음이에요.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속전이 지불되고 나니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왔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의와 하늘의 거룩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속전 있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죽지않습니다. 내 영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영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멘이시요, 말씀이신 예수님 어서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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