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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성숙한 예언의 관문-자기 부인 본문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들려지는 음성이 예언적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음성은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들려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언자에게 주어지는 음성은 예언적으로 들려지게 됩니다. 보편적으로 듣는 음성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자신의 영을 함양하기 위해서 들려지므로 이런 음성은 무척 주관적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 말씀을 듣게 되더라도 그 말씀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성향이 더 강합니다. 이는 성령의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위로자요, 안위하는 분이기 때문에 주로 내편이 되어서 자신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 대한 말씀일지라도 무척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며, 이 역시 주관적인 입장을 우선하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됩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기를 때 주로 자식의 편에 서서 모든 것을 이해시키고 가르치듯이 성령 역시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냉정한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예언자들이 듣는 음성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이 듣는 타인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이 중보를 위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중보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때 그 기준은 중보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음성을 듣는 사람이 객관적 시각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시각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어쩌면 자신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극단의 거친 시험 과정을 지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겪은 가혹한 선택들에서 잘 나타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가 되어있는 수 형제의 책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서 보듯이 그런 거친 과정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단편적인 말을 들어보면 엄청난 고난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좀처럼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지요. 변한다고 해도 주변의 것들만 변하지 본질적인 것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까지 철저히 변화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변화 과정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만이 아니라 그 후 14년의 고립과 은둔이라는 가혹한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지요. 그처럼 우리의 가치관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가치관 또는 고정관념에 도전이 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센 저항을 하게 됩니다.
이 저항은 하나님이 그 대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으로 사물을 다루어가십니다. 쉽게 말하면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얼려가면서 이끄는 것과 흡사합니다. 아이 편에 서서 옳다고 추켜세우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지요. 강하게 다루면 팽개치고 다라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독거리면서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렇게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는 음성은 대부분이 각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몹시 못마땅하게 보일 것입니다.
남의 자식에게는 냉정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자녀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약점입니다. 남에게는 냉정하고 자신에게는 한 없이 관대한 것이 우리들의 이중성이기 때문에 성령도 이런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아니면 우리들이 듣는 성령의 음성은 무척 주관적이며, 아전인수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음성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 객관성을 지녔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자신을 옹호하고 함양하기 위해서 들려지기 때문에 마치 부모에게 가서 판단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편이지 남의 편이 아닙니다. 정말로 크게 잘못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식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부모로부터 가치 판단을 배운다면 그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듯이 성령의 음성을 모두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똑 같은 사안을 놓고 각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르게 느낍니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응답을 들었는데 상대방은 하나님으로부터 저렇게 듣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음성을 듣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에게는 이런 것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는 성숙한 예언자에게는 주관이 허용되지 않으며 오로지 철저한 객관만이 용납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언자로 세움을 받을 사람은 주관적인 시각을 버리게 하는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각을 얻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친 과정이며, 혼동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갈등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분요(紛擾)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지며 어쩔 수 없이 다른 페러다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계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그 예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며,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들을 담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를 세우고 교회에 비전을 공급하는 그런 차원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며, 이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며, 많은 상징을 동원하며, 예언자의 세계관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선교 여행을 하게 된 주된 배경에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계시를 따라서 여행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언자들에게 이와 관련된 예언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언을 따르지 않고 계시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에는 객관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철저한 객관(하나님의 시각)에 근거한 것이며, 예언자의 주관적 판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이런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고는 계시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되어서 계시적 예언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고정관념이 모질게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중보기도자와 초보 예언자는 성령의 음성을 주로 주관적으로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아직 예언자의 단점인 가정(assumption)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가정은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수준과 정보의 양에 따라서 예언을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음성을 듣더라도 그 주체가 하나입니다. 즉 어떤 영적 주체 하나만으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다양한 영적 주체들 즉 대언의 영, 예수의 영, 천사들, 성령 등과 같은 영적 실체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만 여전히 자신의 본위로 듣고 있으며, 이는 자신을 세우기 위한 과정에 아직도 머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인 성도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기중심적인 음성만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타인을 위한 중보일지라도 역시 자기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고 따라서 조언해 준다고 해도 주관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갈등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주관적인 음성듣기가 일반적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은 늘 자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들려진다는 것을 서로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로 세워질 사람에게는 객관성이 필요하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예언자에게는 계시적인 예언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계시적인 예언이 임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세계와 국가에 대한 거시적인 예언을 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려진 예언자들처럼 그렇게 예언할 수 있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가치관과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수많은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며, 극도의 가치 혼란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시각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가혹하게 다룹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견고한지 자신도 잘 모를 것입니다. 견고한 성인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다림줄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아주 다른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면 먼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다루는 방법이 이렇듯이 순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 장면에서 보듯이 가인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에게 분노합니다(창 4:5). 하나님은 그런 가인에게 어찌 안색이 변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아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언자가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하나님의 시각이 충돌할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친 광야를 준비합니다. 철저한 실패와 좌절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하나씩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포기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화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방법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고 다 겪은 바이지만 계속 한 가지 방법을 지루하고 넌더리가 날 정도로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저한 다룸이 없으면 우리는 다 사라진 것 같았던 관념들이 어느 순간엔가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아카시아 뿌리처럼 깊고 질깁니다. 다 잘라내고 파헤쳤다고 생각해도 이듬해에는 다시 아카시아 새싹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우리의 고정관념은 되살아납니다.
똑같은 시험을 지겹게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지쳐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깊고 질긴 쓴뿌리를 발견하게 되며,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자극(stimulation)으로 오는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세게 저항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되기 때문에 아픕니다. 분노가 여러 날 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공고하게 방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을 다루실 때 우리가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십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거칠게 매질하면서 가르치는데 그 곁에서 위로하면서 안아주시는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은 그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나무라면서 자식 버릇을 잘못 들인다고 야단을 칩니다. 아버지는 치시고 어머니는 감싸고 그래서 어린 자식은 어머니 품만 찾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영의 이치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치시고 싸매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아직 어린 우리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싸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즉 자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위로만 기억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해야 할 기회를 잃게 되고 계시적인 예언으로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만 찾는 사람은 늘 위로의 말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늘 위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계시적인 예언은 할 줄 모르게 됩니다.
계시적인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강력한 경고와 거친 언어로 책망합니다. 책망과 경고가 주된 내용인 계시적 예언은 안위와 위로와 자비가 주된 내용인 일반적인 예언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계시적인 예언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예언자를 거칠게 다루는 것입니다. 샌드페이퍼처럼 겉면이 거칠어야 대상을 아름답게 다듬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거친 과정을 치른 예언자는 담력을 얻게 되고 그 어떤 비판에도 담담해질 수 있으며,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거친 예언에 대해서 저항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눈도 꿈쩍하지 않게 됩니다. 그 어떤 비난과 판단에도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내려놓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이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관념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계시는 계시가 되지 않고 예언이 될 뿐입니다. 예언은 듣는 사람의 식별과 판단이 필요로 하지만 계시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희귀합니다.
장봉운부모가 어린 자녀를 기를 때 주로 자식의 편에 서서 모든 것을 이해시키고 가르치듯이 성령 역시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냉정한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예언자들이 듣는 음성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이 듣는 타인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이 중보를 위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중보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때 그 기준은 중보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음성을 듣는 사람이 객관적 시각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시각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어쩌면 자신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극단의 거친 시험 과정을 지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겪은 가혹한 선택들에서 잘 나타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가 되어있는 수 형제의 책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서 보듯이 그런 거친 과정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단편적인 말을 들어보면 엄청난 고난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좀처럼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지요. 변한다고 해도 주변의 것들만 변하지 본질적인 것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까지 철저히 변화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변화 과정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만이 아니라 그 후 14년의 고립과 은둔이라는 가혹한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지요. 그처럼 우리의 가치관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가치관 또는 고정관념에 도전이 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센 저항을 하게 됩니다.
이 저항은 하나님이 그 대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으로 사물을 다루어가십니다. 쉽게 말하면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얼려가면서 이끄는 것과 흡사합니다. 아이 편에 서서 옳다고 추켜세우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지요. 강하게 다루면 팽개치고 다라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독거리면서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렇게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는 음성은 대부분이 각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몹시 못마땅하게 보일 것입니다.
남의 자식에게는 냉정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자녀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약점입니다. 남에게는 냉정하고 자신에게는 한 없이 관대한 것이 우리들의 이중성이기 때문에 성령도 이런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아니면 우리들이 듣는 성령의 음성은 무척 주관적이며, 아전인수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음성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 객관성을 지녔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자신을 옹호하고 함양하기 위해서 들려지기 때문에 마치 부모에게 가서 판단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편이지 남의 편이 아닙니다. 정말로 크게 잘못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식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부모로부터 가치 판단을 배운다면 그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듯이 성령의 음성을 모두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똑 같은 사안을 놓고 각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르게 느낍니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응답을 들었는데 상대방은 하나님으로부터 저렇게 듣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음성을 듣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에게는 이런 것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는 성숙한 예언자에게는 주관이 허용되지 않으며 오로지 철저한 객관만이 용납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언자로 세움을 받을 사람은 주관적인 시각을 버리게 하는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각을 얻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친 과정이며, 혼동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갈등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분요(紛擾)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지며 어쩔 수 없이 다른 페러다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계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그 예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며,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들을 담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를 세우고 교회에 비전을 공급하는 그런 차원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며, 이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며, 많은 상징을 동원하며, 예언자의 세계관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선교 여행을 하게 된 주된 배경에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계시를 따라서 여행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언자들에게 이와 관련된 예언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언을 따르지 않고 계시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에는 객관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철저한 객관(하나님의 시각)에 근거한 것이며, 예언자의 주관적 판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이런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고는 계시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되어서 계시적 예언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고정관념이 모질게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중보기도자와 초보 예언자는 성령의 음성을 주로 주관적으로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아직 예언자의 단점인 가정(assumption)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가정은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수준과 정보의 양에 따라서 예언을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음성을 듣더라도 그 주체가 하나입니다. 즉 어떤 영적 주체 하나만으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다양한 영적 주체들 즉 대언의 영, 예수의 영, 천사들, 성령 등과 같은 영적 실체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만 여전히 자신의 본위로 듣고 있으며, 이는 자신을 세우기 위한 과정에 아직도 머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인 성도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기중심적인 음성만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타인을 위한 중보일지라도 역시 자기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고 따라서 조언해 준다고 해도 주관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갈등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주관적인 음성듣기가 일반적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은 늘 자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들려진다는 것을 서로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로 세워질 사람에게는 객관성이 필요하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예언자에게는 계시적인 예언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계시적인 예언이 임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세계와 국가에 대한 거시적인 예언을 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려진 예언자들처럼 그렇게 예언할 수 있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가치관과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수많은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며, 극도의 가치 혼란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시각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가혹하게 다룹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견고한지 자신도 잘 모를 것입니다. 견고한 성인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다림줄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아주 다른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면 먼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다루는 방법이 이렇듯이 순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 장면에서 보듯이 가인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에게 분노합니다(창 4:5). 하나님은 그런 가인에게 어찌 안색이 변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아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언자가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하나님의 시각이 충돌할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친 광야를 준비합니다. 철저한 실패와 좌절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하나씩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포기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화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방법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고 다 겪은 바이지만 계속 한 가지 방법을 지루하고 넌더리가 날 정도로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저한 다룸이 없으면 우리는 다 사라진 것 같았던 관념들이 어느 순간엔가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아카시아 뿌리처럼 깊고 질깁니다. 다 잘라내고 파헤쳤다고 생각해도 이듬해에는 다시 아카시아 새싹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우리의 고정관념은 되살아납니다.
똑같은 시험을 지겹게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지쳐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깊고 질긴 쓴뿌리를 발견하게 되며, 그것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자극(stimulation)으로 오는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세게 저항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되기 때문에 아픕니다. 분노가 여러 날 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공고하게 방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을 다루실 때 우리가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십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거칠게 매질하면서 가르치는데 그 곁에서 위로하면서 안아주시는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은 그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나무라면서 자식 버릇을 잘못 들인다고 야단을 칩니다. 아버지는 치시고 어머니는 감싸고 그래서 어린 자식은 어머니 품만 찾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영의 이치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치시고 싸매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아직 어린 우리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싸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즉 자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위로만 기억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해야 할 기회를 잃게 되고 계시적인 예언으로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만 찾는 사람은 늘 위로의 말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늘 위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계시적인 예언은 할 줄 모르게 됩니다.
계시적인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강력한 경고와 거친 언어로 책망합니다. 책망과 경고가 주된 내용인 계시적 예언은 안위와 위로와 자비가 주된 내용인 일반적인 예언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계시적인 예언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예언자를 거칠게 다루는 것입니다. 샌드페이퍼처럼 겉면이 거칠어야 대상을 아름답게 다듬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거친 과정을 치른 예언자는 담력을 얻게 되고 그 어떤 비판에도 담담해질 수 있으며,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거친 예언에 대해서 저항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눈도 꿈쩍하지 않게 됩니다. 그 어떤 비난과 판단에도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내려놓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이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관념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계시는 계시가 되지 않고 예언이 될 뿐입니다. 예언은 듣는 사람의 식별과 판단이 필요로 하지만 계시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희귀합니다.
출처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글쓴이 : 차니미니파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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