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 키우기
[스크랩] ☞ 영안이 열리기 위한 전제들(1) 본문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는 말씀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하며, 지각 있는 사람으로서 행할 태도가 아닙니다. 도마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며, 저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도마와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으로 취급을 당하였지만 실제로 도마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비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후에 그냥 믿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남용되기도 하지만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본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세계는 영적 세계입니다. 이는 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안이 열렸다’라는 말이 그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사는 동안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수시로 영안이 열려 영적 세계를 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은 영안이 열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임종을 앞두고 열리는 경우입니다. 죽음이 임박해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영안이 열려 자신을 데리고 갈 영적 존재를 보게 됩니다. 불신자는 사단의 영을 보며, 성도는 천사를 봅니다. 불신자는 너무도 무서워 떨지만 이미 그의 삶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영안이 열림과 동시에 이 땅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적 눈이 띄어서 영적 실체를 보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영적 세계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성도들 역시 이 세계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세계를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원리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믿음 속에 넣어두었으며, 우리는 이 기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이 실감하게 됩니다. 이 기능이 ‘이미지의 기능’입니다. 상상의 세계가 그것인데 이는 공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바탕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그림을 만들어내며 이 그림은 실제처럼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지 못했지만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가 보지 못한 약속을 본 것처럼 행동한 배경은 그가 약속을 마음속에 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던 사람이 천국을 다녀오고 난 후에는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됩니다. 그가 경험한 천국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었지만 그는 실제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보는 것이 얼마나 강한 힘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건성으로 형식적인 믿음 생활을 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영적 경험을 겪고 난 후에는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열성적인 그리스도의 일꾼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실제로 영안이 열려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예외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예외적인 일을 일상적인 것으로 알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란 곧 상상의 세계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형상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을 이미지로 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때 귀로는 들으면서 머리로는 그림을 그립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실제처럼 그림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실체처럼 살아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이것은 상상의 세계이지만 이 상상력이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그것과 대화합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마치 성우처럼 장난감 하나하나에게 생명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즐겁게 놉니다. 어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놉니다. 이러던 아이가 자라면서 이런 일들이 점차로 사라지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서 이런 세계를 공상이라고 생각하고 버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 기능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수는 단순히 순진무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성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사물과 끝없이 대화하며 모든 물체를 생명으로 인식하고 그것과 대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시절이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 기능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이 순수함에서 출발합니다.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벗어나야 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크게 여섯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주의를 벗어야 합니다.
성경주의(biblicism)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로지 성경 이외에는 없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며, 성경에서만 모든 것을 구하고 찾으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만 매달린 나머지 성령의 도우심이나 성령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영어 표현으로는 ‘illumined scriptures’라고 하는데 성경을 묵상할 때 성경을 배경으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을 ‘rehm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자신의 의지로 깨닫는 지성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써,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고 기능이 누구에게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지적 작용으로 얻은 지식은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경건의 모습은 생길지 몰라도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지적인 인식과 성령의 일깨움과의 차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삭막하기만 합니다. 학구적인 사람은 학문적 성취로 인해서 그 일에 전념하게 되고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공부도 그런 학문적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과 동일한 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합리주의(Rationalism)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합리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사고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며, 세상의 체계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며, 특히 영적인 일보다는 이성적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초월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비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합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합니다. 근대 독일 신학은 이런 주의 일들을 신화라고 몰아붙입니다. 합리주의는 자신의 사고체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예수 탄생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이지요. 예수 탄생을 안 사람은 별의 지시를 받은 동방박사와 천사의 계시를 받은 들판의 목동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를 경배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수단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별과 천사였습니다.
합리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 체계에 합당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자신의 수준에서 다룹니다. 그러므로 많은 기사와 표적들을 신화로 또는 설화로 취급합니다. 이들은 주의 보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림 즉 ‘flowing pictures’나 성령으로부터 오는 ‘spontaneity guide’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호한 무의식 체계에서 오는 감각적 작용이라고 무시합니다. 이성적 사고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들에는 꿈이란 프로이드가 만든 무의식의 작용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않습니다.
셋째, 쾌락주의(Hedonism)에서 벗어납시다.
쾌락주의란 우리의 삶에서 얻어지는 ‘최고선’을 말합니다. 삶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봉사도 하고, 공동체 활동을 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려고 합니다. 삶의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다양한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것은 불교신자들이 ‘보시’(布施)함으로써 맛보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학구적인 사람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학문적 성취를 맛보게 되며, 그 즐거움 때문에 성경 읽기에 푹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골 3:15)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의 평화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즐거움을 육체의 노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봉사와 헌신에서 오는 즐거움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육체의 즐거움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즐거움은 육체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육체의 사람이며, 그가 맛보는 즐거움은 육체를 따라 온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인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무수한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평안 때문에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는 일꾼들은 육체로는 얻는 것이 없더라도 영으로 누리는 비길 데 없는 즐거움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업고, ...없고,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합 3:17~18).(다음의 글로 이어집니다.)
-장봉운-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세계는 영적 세계입니다. 이는 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안이 열렸다’라는 말이 그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사는 동안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수시로 영안이 열려 영적 세계를 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은 영안이 열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임종을 앞두고 열리는 경우입니다. 죽음이 임박해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영안이 열려 자신을 데리고 갈 영적 존재를 보게 됩니다. 불신자는 사단의 영을 보며, 성도는 천사를 봅니다. 불신자는 너무도 무서워 떨지만 이미 그의 삶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영안이 열림과 동시에 이 땅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적 눈이 띄어서 영적 실체를 보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영적 세계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성도들 역시 이 세계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세계를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원리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믿음 속에 넣어두었으며, 우리는 이 기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이 실감하게 됩니다. 이 기능이 ‘이미지의 기능’입니다. 상상의 세계가 그것인데 이는 공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바탕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그림을 만들어내며 이 그림은 실제처럼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지 못했지만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가 보지 못한 약속을 본 것처럼 행동한 배경은 그가 약속을 마음속에 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던 사람이 천국을 다녀오고 난 후에는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됩니다. 그가 경험한 천국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었지만 그는 실제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보는 것이 얼마나 강한 힘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건성으로 형식적인 믿음 생활을 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영적 경험을 겪고 난 후에는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열성적인 그리스도의 일꾼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실제로 영안이 열려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예외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예외적인 일을 일상적인 것으로 알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란 곧 상상의 세계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형상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을 이미지로 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때 귀로는 들으면서 머리로는 그림을 그립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실제처럼 그림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실체처럼 살아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이것은 상상의 세계이지만 이 상상력이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그것과 대화합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마치 성우처럼 장난감 하나하나에게 생명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즐겁게 놉니다. 어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놉니다. 이러던 아이가 자라면서 이런 일들이 점차로 사라지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서 이런 세계를 공상이라고 생각하고 버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 기능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수는 단순히 순진무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성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사물과 끝없이 대화하며 모든 물체를 생명으로 인식하고 그것과 대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시절이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그 기능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이 순수함에서 출발합니다.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벗어나야 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크게 여섯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주의를 벗어야 합니다.
성경주의(biblicism)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로지 성경 이외에는 없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며, 성경에서만 모든 것을 구하고 찾으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만 매달린 나머지 성령의 도우심이나 성령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영어 표현으로는 ‘illumined scriptures’라고 하는데 성경을 묵상할 때 성경을 배경으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을 ‘rehm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자신의 의지로 깨닫는 지성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써,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고 기능이 누구에게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지적 작용으로 얻은 지식은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경건의 모습은 생길지 몰라도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지적인 인식과 성령의 일깨움과의 차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삭막하기만 합니다. 학구적인 사람은 학문적 성취로 인해서 그 일에 전념하게 되고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공부도 그런 학문적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과 동일한 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합리주의(Rationalism)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합리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사고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며, 세상의 체계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며, 특히 영적인 일보다는 이성적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초월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비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합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합니다. 근대 독일 신학은 이런 주의 일들을 신화라고 몰아붙입니다. 합리주의는 자신의 사고체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예수 탄생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이지요. 예수 탄생을 안 사람은 별의 지시를 받은 동방박사와 천사의 계시를 받은 들판의 목동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를 경배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수단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별과 천사였습니다.
합리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 체계에 합당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자신의 수준에서 다룹니다. 그러므로 많은 기사와 표적들을 신화로 또는 설화로 취급합니다. 이들은 주의 보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림 즉 ‘flowing pictures’나 성령으로부터 오는 ‘spontaneity guide’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호한 무의식 체계에서 오는 감각적 작용이라고 무시합니다. 이성적 사고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들에는 꿈이란 프로이드가 만든 무의식의 작용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않습니다.
셋째, 쾌락주의(Hedonism)에서 벗어납시다.
쾌락주의란 우리의 삶에서 얻어지는 ‘최고선’을 말합니다. 삶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봉사도 하고, 공동체 활동을 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려고 합니다. 삶의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다양한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것은 불교신자들이 ‘보시’(布施)함으로써 맛보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학구적인 사람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학문적 성취를 맛보게 되며, 그 즐거움 때문에 성경 읽기에 푹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골 3:15)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의 평화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즐거움을 육체의 노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봉사와 헌신에서 오는 즐거움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육체의 즐거움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즐거움은 육체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육체의 사람이며, 그가 맛보는 즐거움은 육체를 따라 온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인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무수한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평안 때문에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는 일꾼들은 육체로는 얻는 것이 없더라도 영으로 누리는 비길 데 없는 즐거움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업고, ...없고,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합 3:17~18).(다음의 글로 이어집니다.)
-장봉운-
출처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글쓴이 : 차니미니파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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