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 키우기
[스크랩] 사랑(1) 본문
저는 지난 주간에 텔레비젼의 어느 프로그램을 보다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녀가 없는 덴마크의 어느 중학교 교사가 한국의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 셋을 데려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키우라고 명령 하셨으니 나는 순종할 뿐이다.'라고 다짐하면서 자신의 친자녀처럼 키웠습니다. 그 중의 한 어린이는 강원도의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잠시 출타한 틈에 혼자 기어 다니며 놀다가 구공탄 불이피어 있는 화덕에 굴러 떨어져 얼굴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어머니가 이아이를 업고 나가면 모두 다 무섭다고 했습니다.
'저 아이의 얼굴을 꿈에 보면 어떡하나?'할 정도로 모두다 피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어린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내버리다시피 홀트아동복지회에 보냈습니다. 이 어린아이를 덴마크의 어느 중학교 교사가 데려다가 세번 성형수술을 해주고, 그 흉악한 얼굴에 입을 맞추며 학교에 보내어 어느덧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국경을, 인종을,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사랑
영국의 미들랜드 지방에는 어떤 사원 앞에 참으로 이상한 두개의 무덤이 있다. 또 그 무덤을 더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무덤 앞에 서 있는 오른손이 없는 여자의 동상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지를 짓밟은 회교도의 손으로부터 그 성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싸우던 때로 돌아간다. 그 전쟁 중에 십자군 소속의 무사 하나가 회교의 정복자인 살라딘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 포로가 된 무사의 약혼자는 자신의 애인을 석방해 줄 것을 집요하게 애걸하여 보았으나 결국은 거절을 당하였다. 그런데 그 악한 살라딘 왕은 그들의 애정이 얼마나 강한가 테스트 해 보기 위하여 그녀의 오른손을 짤라보내면 그 무사의 사형을 사면해 주고 석방해 돌려 보내겠다는 사연을 적어서 사신을 시켜서 그녀에게 보냈다. 이 편지을 읽는 순간에 그녀는 즉석에서 자기의 오른손을 칼로 잘라서 종이에 싸서 정복자인 살라딘 왕에게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 앞에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
기독교 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던 무섭고 끔찍한 상황속에서 한 성도가 순교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나는 신음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요.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사랑
아주 무더운 여름날, 조그마한 소년하나가 뜰에서 놀고 있었읍니다. 어린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흙장난을 좋아합니다. 손이 더럽게 되었읍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왔읍니다. 날이 더운 때였으므로 아버지는 뜰에 앉으시며 이 조그마한 아이에게 덥다고 말했읍니다. 그러자 아이는 아버지께 얼음물 한 잔을 마시겠느냐고 여쭈었읍니다. 아버지가 좋다고 하자 아이는 부엌으로 달려갔읍니다. 얼음 냉수를 떠서 글래스에 담았읍니다. 그 글래스의 물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꼭 잡느라고 손가락 하나를 그만 글래스에 넣었읍니다. 그래서 흙이 이 유리잔에 들어갔읍니다. 소년은 그 물을 아빠에게 권했읍니다. 아버지는 그 유리잔을 들고 아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읍니다. 완전한 것은 무엇을 어느 정도 성취하느냐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엇을 하려고 했다는 그 의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소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읍니다. 그것이 완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람은 어떤 형태로 행동합니까? 예민한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을 합니까? 그리고 완전한 것을 이루고자 행동합니까?
사랑
이태리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는 본래 부자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고, 자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는 홀홀단신 떠돌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일생을 바치었다. 어느 땐가 프랜시스는 앗시스의 교외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그 도중에 문둥병자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그 병자 앞을 무의식 중에 그냥 지나쳤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도저히 그냥 갈 수는 없었다. 프랜시스는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 그 문둥병자에게 가지고 있던 일체의 것을 주었다. 문둥병자는 황송하여 썩어 진물이 흐르는 더러운 손을 내어 밀었다. 그때 프랜시스는 내밀어진 문둥병자의 더러운 손을 덥썩 잡고 입을 맞추어 주었다. 문둥병자 걸인은 더욱 더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채워진 사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 진물 가득한 문둥병자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사랑
아빠와 엄마 그리고 7살 난 아들과 5살짜리 딸이 살았습니다. 어느날 아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가 일어나 아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응급수술을 받던 중 피가 필요했는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은 딸이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얘야,너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꼬마는 이 질문에 잠시동안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가 대성공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딸 아이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어!"
아빠의 말을 들은 딸이 낮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나요?"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죽다니,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그렇담 피를 뽑아도 죽는게 아닌가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흐른 뒤 아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넌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단 말이냐?"
"네, 전 오빠를 사랑하거든요..."
사랑
소설 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의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고 약혼을 했다.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던 중에 돌연히 군대의 입대 영장을 받은 신랑은 전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전쟁터의 약혼자로부터는 이삼일이 멀다고 편지가 왔다. 그런데 한동안 편지가 뜸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나는 싸움터에서 나의 두 손을 잃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대를 약혼의 약속에서 놓아드립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도록 하십시오. 이 편지는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대필을 해 준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약혼녀는 아무 답장도 안 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기차를 잡아타고 남쪽으로 향하여 약혼한 남자의 병원을 찾았다. 그 여자는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서 병원으로 갔다. 드디어 병실을 찾아 두 손을 다 잃은 약혼자를 발견했을 때, 그 여인은 가장 사랑에 넘치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나는 결단코 그대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사랑으로 우리의 일생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이다.
사랑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또 하나 있읍니다. 이 것은 완전성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나 좋다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주 비판적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결혼준비가 된 어떤 소녀가 있읍니다. 그녀는 자기가 입을 결혼 예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겠읍니까? 결혼식 30분 전에 집에 뛰어 들어가서 만들까요? 옷장을 열고 아무 옷이나 골라 입을까요? 그리고 급하게 머리를 빗고 식을 올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일 좋은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손질을 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머리 손질하는데 2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읍니다. 신부는 그 머리를 예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됩니다.
사랑 공동체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의 가정은 화목과 사랑의 공동체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우애를 강조하면서 격려하며 살 것을 권면했다.
어느 날 밤. 가족이 잠들 무렵,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다른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훨씬 나은 거란다."
사랑 나누기
미국의 실업가이며 자동차 왕인 헨리 포드(1863∼1947)는 고난을 딛고 미래를 개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자인 그는 자동차개발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는 무엇보다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과 쉽게 자포자기하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호였으나 검소했다.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나누어주는 삶을 실천했다. 그의 집 벽난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자기 자신의 장작을 쪼개라. 그리하면 이중으로 따뜻해진다」
사랑 다음의 사랑
얼마전 모 잡지에 실렸던 실화입니다. 32세의 이혼모인 크리스틴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빈곤이 덮쳐 그나마 병원에서조차 거부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의사들은 크리스틴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마을 국민학교의 교장이 교사와 학부형 모임에 모금을 제안했고 즉석에서 상처받고 죽어가는 여인을 위해 3000불을 모았습니다. 그 돈이면 모든 빚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달 교회 목사님은 회중에서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크리스틴이 집으로 돌아와 죽기를 원하고 있다고. 그러나 그를 돌바아 줄 사람은 국민학교 2학년인 딸과 늙은 어머니뿐. 그래서 마을 여인 30명이 간호를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임박해 있는 죽음과 그 고통에 맞서 씨름해야 하는 크리스틴을 돌본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한 모금도 먹고 마실 수 없었고 죽음의 그늘이 그녀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웃은 크리스틴이 고통받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순간, 가리스틴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원하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 눈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수고에도 보람없이 크리스틴은 죽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온 마을 사람들은 허탈감에 빠지는 대신 이 경험을 통하여 죽음의 공포, 고독의 공포를 이기는 새로운 치유를 경험하게 된것입니다. 이 작은 마을은 어떤 시험과 시련도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는 사라의 공동체로 변신한 것입니다. 참 사마리아 사람인 예수께서는, 사랑과 정의 를 심어가는 그 마을 공동체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 다음의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 이야기
할렐루야! 천사의 소리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 전서 13:13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번은 공원에 갔는데 어떤 두 청춘 남녀를 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어찌나 다정스럽게 얘기를 나누는지 당시 노총각이었던 저는 셈이 날 정도 였습니다. 눈에는 사랑이 넘치고, 입가에는 다정스런 미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작 감탄한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 이었습니다. 총각은 누가 봐도 핸섬한 미남자였습니다. 부드럽고, 귀여우면서도 이목구비가 수려한 귀공자 타입이었습니다. 그런데 처녀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아무리 봐도 그 총각과는 어울리지 않는 덜 생긴 아가씨였습니다. 솔직히 저같으면 부끄러워 함께 손을 잡기는 커녕 데이트도 어림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을지는 따뜻한 봄날 벤치에 앉아 그야말로 정답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하기를 아하! 사랑이로구나, 사랑 때문 이로구나 사랑의 위대성을 다시 한번 확인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가 살고있던 건물의 아래층 아주머니는 틈만 나면 올라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주로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자신이 못생겼다고 외출을 해도 몇 미터 떨어져가고, 주일날 성당에 갈 땐 뒤에 오라고 한뒤 먼저가버리고, 심지어는 퇴근해 오면 어머니의 방에 곧 바로 건너간 다음 12시쯤 잠잘 때만 기어들어 왔다가 잠 자고 아침에는 출근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후 수십년동안 계속 그런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녀는 몇을 두었는데 그 집 딸은 엄마를 닮아 외모가 그럭저럭 생겼고 어렸을 때 심하게 아파 머리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묵고 다니는데 우리가 봐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웬 새소리가 담장에서 울리고, 멀대같이 키가 큰 청년 하나가 집안을 기웃기웃 거렸습니다. 그 못난이 딸의 애인이었습니다. 새소리 만나면 제 어머니는 알아 차렸습니다. 또 왔구먼 아랫집 처녀 애인이, 그러면 아니나 다를까 창문이 드르륵 열리고 누가보건 말건 얼마동안이나 둘이는 소곤 소곤 거렸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묘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세상은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살 이유가 없습니다. 살 힘도 없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존재의 이유요, 목적이요, 살게 하는 동기요, 힘이요, 삶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 이심이라'[요한1서 4:8]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랑때문이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물론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랑은 상대성입니다. 혼자는 사랑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씨멘트가 전혀 붙을 수 없는 물과 자갈과 모래를 콘크리트로 굳게 만들듯이 사랑은 가정을, 사회를, 민족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구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기적을 창조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주머니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었니.”하고 1학년짜리 손녀딸 매리 레슬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손녀딸은 학교가 끝나자마다 털실 손잡이가 달린 빨간색의 공작종이로 만들어진 봉투를 가지고 우리집으로 달려온 것입니다.“할머니. 이거는 .사랑 주머니.에요.”하고 손녀딸이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머니 속에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싸우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이 사랑 주머니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다음날 나는 가위와 털실과 공작종이를 커내어 나를 위한 .사랑주머니.를 만들었습니다.그리고 나서는 가시 돋힌 말을 잘하는 친구. 병 중에 있는 친구. 나하고 다른 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의 이름을 적어 그 안에 넣어두었습니다.나는 나의 사랑 주머니를 벽에 걸려 있는 달력 옆에 걸어놓았습니다. 그 날의 약속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달력 안에 기록할 때마다 나는 사랑 주머니 속에 담겨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답니다. 때때로 사랑 주머니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할 때는 많지만 텅 비어 있는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사랑표현법
어느 교회에 아주 내성적인 할머니 성도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성격 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웃에게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설교를 들은 할머니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할머니에게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차츰 할머니는 이웃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이웃이 이사를 가고 그들이 살던 집이 비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곧 그 집에 이사올 새로운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드디어 새 이웃의 짐을 실은 트럭이 도착하는 날이 되자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을 두드리면서 쇼핑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후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지고 이사온 집으로 갔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길 건너 사는 사람입니다 방금 이사오셨지요? 아침을 준비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좀 가지고 왔어요." 마침내 할머니는 그토록 망설여왔던 사랑의 표현을 시작한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할머니는 새로 이사온 이웃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 가족 전원이 전도 받아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인간의 관계
당신의 열대어를 기른다고 하자. 그 열대어는 직사각형으로 된 수포 발생기가 있는 수조에서 산다고 하자. 그 물고기가 복받은 그 어항에서 빙빙돌면서 수영을 하고 다니다가 마침내 더 이상 좌절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유를 얻으려고 결심하고 그 제한된 공간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하자.
만일 어떻게든 해서 그 물고기가 당신의 정원안에 있는 연못 속에라도 뛰어 들어갈 수가 있다면 그 물고기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겠지만 하지만 그 대신에 양탄자 위나 도로 위로 떨어진다면 도피하려는 그 물고기의 시도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도록 만들어졌는가? 물이 물고기가 물고기 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라면 인간이 인간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은 사랑, 바로 사랑의 관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는 것 처럼, 새가 공기를 필요로 하는 것 처럼,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랑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사랑과 친절로 교육하고 가르치라.
코카콜라는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세계적인 음료수입니다.
코카콜라를 처음 만든 아사 켄들러는 자기가 경영하던 작은 약국의 지하실에서 이 짜릿한 음료수의 제조권을 구입한 후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돈더미 위에 올라 앉는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인 아서 쥬니어가 알콜 중독에 걸려 재산을 없애고 몸과 마음이 병이 든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쥬니어에게는 목사인 삼촌이 있었습니다. 그 삼촌은 사랑하는 조카가 알콜 중독에 걸려 폐인이 되어가자 남다른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고 이 조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켄들러 목사는 자기 조카를 한번도 꾸짖거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어떤 때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따뜻한 눈빛을 주면서 부드럽게 껴안아 주기만 했습니다. 삼촌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된 아서 쥬니어는 어느 날 술병을 들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술병의 마개를 따지 않겠소. 이 순간부터 술을 끊겠소." 아서 쥬니어는 그 순간부터 술을 끊었고 그의 아내는 그 술병을 리본으로 묶어 가보로 보관하였으며, 지금도 그 술병은 코카콜라 회장인 켄들러 집안의 중요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과 행복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친구 데일 갤로웨이가 즐겨 말하듯이, 사랑은 보다 나은 것을 얻기 위하여 보다 못한 것을 포기함을 수반한다. 사랑은 때때로 자신이 사랑하는 형제나 자매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의 취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때때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0:31). 진실한 사랑은 가끔 당신의 필요를 위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은 순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사랑은 결코 보다 못한 것을 습득하기 위해 보다 나은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다음을 점검해보자. 당신의 취향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착취이다. 타인의 변덕을 위해 당신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남용이다. 당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키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 때문에 당신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광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언제나 예외없이 당신의 최상의 유익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느 누구도 희생시킴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당신의 삶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한다.
사랑받는 아내
탈무드에 나오는 글이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네가 계집종처럼 처신한다면 남편은 너를 노에처럼 다루고, 만일 네가 너무 자좀심을 내세워 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만일 남편이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갈때는 목욕도 하게 하여 몸치장을 잘해서 보내도록 할 것이고, 남편의 친구가 놀러 올 때는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남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룸을 귀중히 여겨라.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것이다."
사랑에 관한 열 가지 명상
-사랑을 얻으려고 흥정하지 말라.
-나를 사랑하거든 그를 사랑하라.
-사랑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갈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결점을 극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라.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는 법,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한눈 팔며 비교하지 말고 앞을 보라.
-가까울수록 예절을 지키라.
-원망이나 저주는 금물.
-닦을수록 윤이 나는 것.
-문제는 살아 있다는 증거, 문제를 두려워 말라.
사랑받은 소년의 변화
일찍 부모를 여읜 어린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끊임없이 말썽을 피워 주위에서 "구제불능의 저질"이란 소리를 들었다.
한 크리스쳔이 이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며 두 번씩이나 옷을 사주었으나 이 아이는 다 찢어버렸다. 그러다 이 아이는 세 번째 옷을 받고 '진실한 사랑의 힘'에 감복, 주일학교에 꼬박 다니며 신앙을 키워나갔다.
아이는 사랑을 받은 후 '저질'에서'보석같은 존재'로 변했다.
이 아이가 바로 중국어사전과 성경을 출간, 중국선교 개척에 큰 공을 세운 스코틀랜드의 목사 R.모리슨(1782-1834)이다.
사랑에 관한 열 가지 명상
-사랑을 얻으려고 흥정하지 말라.
-나를 사랑하거든 그를 사랑하라.
-사랑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갈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결점을 극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라.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는 법,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한눈 팔며 비교하지 말고 앞을 보라.
-가까울수록 예절을 지키라.
-원망이나 저주는 금물.
-닦을수록 윤이 나는 것.
-문제는 살아 있다는 증거, 문제를 두려워 말라.
사랑에 눈이 멀면
아프리카의 조그만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유학 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내면서 말도 익히고 사람들도 사귀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에서 장학금도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직원으로 있는 아름다운 한국 여성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산책을 같이 하고 쇼핑도 함께 했으며 고궁에도 함께 갔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구혼을 했습니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결국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피부색이 검은 사람과 결혼하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말리기도 했고, 현지로 돌아가면 말할 수 없는 고생이 있다고 충고도 했으며,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결혼하여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결혼한 이유는 다만 이 남자가 '가장 멋진 사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메는 짐
나의 어머니께서는 내 큰 딸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때 자주 업어주시곤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무게가 무거웠던 아이라 자라면서도 크고 무거웠습니다. 어머님은 왜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이를 업고 계시면 어머님 자신도 힘들고 업혀 있는 아이도 힘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드실테니까 저 혼자 놀도록 내버려두시라고 말씀을 드리면. 정색을 하시면서 내가 업지 않으면 아이가 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혼자 놔두면 잘 놀지만 업는 날이면 끙끙 앓고 웁니다. 이유는 할머니의 등 허리에 매달려 있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 저녁이면 할머니도 끙끙 앓고 손녀도 끙끙 앓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 속에서 짐은 짐이로되 사랑으로 메는 짐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고단이라든지 피곤이라는 것들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면 내가 지금 져야하고 지고 있는 짐이라고 하는 것들이 기쁘고 즐거운 조건이 될지언정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운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게서 우주보다 더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주셨습니다. 주님은 내대신 십자가의 짐을 지시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물과 피를 쏟으시고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나에게 쉽고 가벼운 짐을 주시면서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 지게 하지 않으시고 주님이 함께 멍에를 메고 짐을 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멍에를 멥시다. 짐을 집시다. 그것이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것입니다.
사랑은 곱하기
30년 가까이 연합배급 만화 “패밀리 서커스”를 그려오면서 나는 사랑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내 가족들은 사랑으로 뭉쳐 있었는데 그 사랑은 종종 내 만화의 주인공인 빌리와 돌리. 제피 또는 피제이가 나오는 만화의 내용이 되곤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관한 한나의 가장 큰 영감은. 그리고 내 만화 속의 .엄마.의 모형은 내 아내 쎌이었다. 우린 다섯 자식을 길렀고(지금은손주가 네 명이다),그애들을 키울때 사람들은 쎌이 어떻게 그 많은 애들을 다룰 수 있는가 하고 궁금히 여기곤 했다. 나 역시도 궁금하게 여겼었다. 쎌은 긁힌 무릎의 상처를 치료 해주든지. 학예회에서 관객으로 앉아 있든지. 식탁에서 숙제를 도와주든. 언제나 우리들을 위해 어김없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쎌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우리에게 더 베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난 역설적인 사랑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제한된. 유한한 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더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소모되어질 수 없다. 대신에 물리학의 법칙과는 달리 사랑은 주면 줄수록 줄 것이 많아진다. 열성이 열성을 낳고. 친절이 친절을 불러일으키고. 유쾌함은 모두를 유쾌하게 하듯 사랑은 줄수록 불어나는 것이다. 만화에 그것을 담아보았다. 엄마가 찬거리 산 것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엔 가방이 매달려 있는데 빌리. 돌리. 제피. 피제이가 그녀의 무릎쪽으로 바짝 붙안겨 있다. 왼쪽의 여자분이 묻는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눠주시죠.” 그러자 엄마가 대답한다. 정말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한 그 말을 말이다. “사랑은 나눠지지 않아요. 사랑은 곱해지는 것이죠.”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이스라엘에서 오랜 전에 있었던 일화.
자독 네이거와 프란스 페레츠는 남편과 아내로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성경의 말씀을 증명해 보였다. 페레츠는 신앙이 돈독한 여성으로 성격이 급한 남편 네이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늘 노력했다가 끝내 이혼했는데, 원인은 남편이 있지도 않은 자신의 부정을 의심하고 열세 발의 기관총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페레츠는 외상만 입고 살아났는데, 회복한 후 네이거를 찾아가 "당신을 옹서합니다."하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두 명의 사복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텔아비브의 한 법정에서 결혼했다. 사랑은 살인동기까지 이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돌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인생 최대의 갈망, 로버트 슐러
사랑은 세계공통 언어
머리에 달린 혹을 그대로 두면 목숨을 잃게 되고 혹을 떼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혹을 떼어 장애인이 된 아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품 <개인적인 체험>의 줄거리다. 그리고 이 소설의 줄거리는 오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 오에의 아들은 '장애의 한계'를 딛고 유명한 작곡가로 성장했다.
오에는 "세계공통의 언어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을 여러분이 보시면 드미뜨리를 검사가 "후레자식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그런 패륜의 자식을 러시아의 모든 아버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발한다."고 고발할 때 방청객들은 주먹을 쥐고, 간음한 현장에 붙잡혀 온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던 군중과도 같이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읍니다. 그러나 제일 유명한 노변호사가 러시아의 아버지들에게 호소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아버지가 빼앗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저 한 마리의 잃어 버린 양에게 러시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돌을 던지지 말기를 바란다."고 할 때 드미뜨리는 생전 처음으로 울어 버렸읍니다. 똑같은 사람을 변호사가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이 울고 동정했지만,검사가 말할 때는 돌로 쳐죽이려는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역사란 거짓이 많긴 합니다만 역사적 사건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읍니다. 크롬웰을 죽일 놈이라고 무덤까지 파 버렸으나 200년 후에 토마스 카알라일이 크롬웰의 일기라든가 편지나 수기 같은 것을 모아서 크롬웰의 전기를 한 권 내놓았읍니다. 그러자 크롬웰을 성자이고 위인이라고 영국의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다시 데려왔읍니다. 이완용이 매국노이고 밤낮 죽일 놈이라고 하는데 어떤 목사가 국회에 '사실은 우리가 알고 보면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변호를 한 번 했다가 혼난 적이 있읍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이가 다 죽일 놈이라고 해도 그의 옆에서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가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만은 영원하다. 지금은 사랑의 지식이 거울로 보듯 희미하나 그 날에는 주님이 내 마음을 보듯 내가 얼굴로 주를 대할 것이며,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한 것인데 그중에 사랑이 최대의 것이다.'고린도전서 13은 그렇게 번역하면 재미있읍니다.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어느 바쁜 아빠가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식구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낚시를 갔답니다.
그날 밤, 그의 일기장에
'오늘은 아이들과 노느라고 소중한 하루를 낭비하고 말았다'라고 적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의 일기장에는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했다. 내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고 썼더랍니다.
모든 아버지들이여,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흠집을 덮는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제일가는 화가에게 그 일을 맡기게 되었다. 화가가 알렉산더 궁전에 들어왔을때, 대왕은 자신의 얼굴 전체가 다 나오도록 그리라고 명령했다.
화가는 매우 언짢아졌다. 왜냐하면 대왕의 오른쪽 뺨에 깊고 끔찍스러운 흉터가 있어서 보기에 흉했기 때문이었다. 그 흉터는 전쟁터에서 생긴 것이었다. 화가는 잠시동안 깊이 생각했다. 곧 바로 좋은 방법을 착안해 냈는데 그것은 초상화도 그릴 수 있고 동시에 흉터도 숨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화가는 대왕을 테이블에 앉게 하고 팔꿈치를 그 위에 얹어 잔(cup) 모양으로 손을 턱에 바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가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화가는 훌륭하고 나무랄 데 없는 대왕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있었다.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나는 매일 시편을 한 편씩 읽으면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능력으로 내가 아플 때나, 낙심하고 좌절할 때 나를 돌아보셨다. 또 실망하고 당황할 때도 나를 붙들어 주셨다. 1948년 루마니아의 한 목사가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어 16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끌려다니면서 매를 맞고, 마취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악랄한 세뇌도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 년간의 투옥 생활 후에 그는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한번은 죄수들에게 가족의 방문을 요청하는 엽서를 쓸 기회가 주어졌다. 세수와 면도를 하고 깨끗한 내의를 받았을 때 죄수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그 역시 면회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엽서가 집에 도착되지 않았던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큰 스피커에서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또 “그들은 더 이상 네게 관심이 없다!”라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대형 스피커에서 “기독교는 죽었다... 기독교는 죽었다”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 왔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온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감옥생활이 그렇게 길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은 그곳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신다. 강인한 전쟁 영웅인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재물도, 위안도, 소망도 사라지나,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베푸는 삶
호주의 오들리에 사는 70세의 노부인이 침례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한 후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교인들에게 “내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길이 뭐 없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할머니에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예수님께 이것을 아뢰었습니다. 얼마 후 이 할머니는 .너는 오들리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금 살고 있는데 네가 알다시피 그 대학에는 외국 학생이 많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데 네가 주일 오후마다 차를 준비해 가지고 이 외국 학생들을 네 집에 초청해서 차를 대접하면 어떠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주일 오후에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한다는 광고지를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첫 주일 오후에는 학생이 한 학생이 왔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세 학생이 왔고 그 다음 주일에는 여섯 명의 학생이 왔습니다. 매주일 학생들이 이 집에 왔습니다. 할머니는 자기의 단순한 말을 가지고서 전에 몰랐던 일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이 할머니의 간증을 통해서 학생들이 하나 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졌을 때 약 70명의 학생들이 장례식에 나와서 운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70명이 이 할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을 안 학생들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분담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사랑을 베푸는 공동체로 세상에 있습니다.
사랑을 생활로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 다녀간 수녀 테레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인 그 분은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유명한 분입니다. 미국에 가면 미국 전역을, 구라파에 가면 전구라파를, 한국에 오면 한국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유고슬라비아인으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연약한 여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적으로 문제도시인 인도의 캘커타에 가서 병든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며 살았습니다. 사랑을 몸으로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활로 옮기는, 즉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자아상을 생활로 옮겨 왔기 때문에 세계가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위대함은 돈이 아닙니다. 지식도 아닙니다. 권력은 더구나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상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노력한 결과 위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축복
인도의 성자인 선다싱이라는 분이 있는데,그 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이 잔뜩 덮힌 히말라야 산 건너편에 있는 사원에 가기 위하여 어느 나그네가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헤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어물어물하다가는 자기도 얼어 죽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후 그 길을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가다가 거의 얼어 죽게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내가 구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 너머 사원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은 힘이 들어 땀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가면서 지나쳤던 사람이 얼어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지나쳐 간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업고 가던 사람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힘을 쏟아 그 자신의 체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내어 결국 두 사람의 주고 받은 체온 덕택에 둘 다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기독교 사랑의 실천윤리입니다.
사랑의 가정
가정은 어떤 곳일까.
요즘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영국의 시인 C.스와인(1801∼1874)의 글을 소개한다.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어떤 것이든 애정을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속삭임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도 반갑게 맞이할 사람이 없는 곳을 어찌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은 우리를 만나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의 교제
몇년전 당시 열여덟살이었던 막내 딸이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아빠, 우리 내일 저녁 함께 식사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어디에 가서 먹을까?" "아무 곳이나 좋아요" 우리는 저녁 일곱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함께 걷다가 한 식당에 들어갔다.
딸과 나는 마주 앉아서 음식을 주문 했는데 그때 나는 딸 아이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나의 자랑스런 딸이 말할 수 없는 깊은 정서적 갈등을 겪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니, 바바라?" "아빠, 아빠랑 저는 요즈음 너무 대화를 하지 않고 있어요.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빠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저녁 식사의 주제가 내가 생각했던 문제중 어떤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으나, 그 동안 내 딸이 더 많은 대화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너무 도외시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구한 것을 묵살했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데에 얼마나 부주의 했던가? 나는 그 후로 대화의 신호를 파악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배웠다.
아마 가족과 함께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일상적 경험들, 압박받는것들, 문제점들, 은총들을 토론하는 양질의 교제를 나누는데 시간을 내야할 것이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사랑의 기도줄
미국 캔사스 엠포리아에 사는 알타 베일 여사는 어떻게 하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가정 주부로서 식사준비도 해야하고 그릇도 닦아야 하고 때로는 빨래도 다려야 한다. 주로 부엌에서 하는 일이 많다. 그리하여 근 느부엌 한 모퉁이에서 건너편 모퉁이에 이르는 줄을 맸다. 그리고는 그날 기도해야 할 사항을 하나하나 카드에 적어서 집게 핀에 물려서 걸었다. 먼저 자기가 기도해야 할 이웃의 이름을 적었고, 교역자와 교회여러 기관도 하나하나 적어서 걸었다. 그리고는 틈이 있을 때마다 카드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했다. 그리하여 그 줄에 걸려 있는 카드가 하나씩 기도한 쪽으로 옮겨지고 다 끝나면 다시 반대 쪽에서 기도해주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주위에 전해지자 저마다 사랑의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 사랑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이뤄주시지 않았겠는가? 루터는 하루 두 시간씩 기도했는데 바쁜 때는 세 시간씩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하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불청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쁨과 의미
사랑을 알려면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놀라운 사랑의 기쁨과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랑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조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앞을 바라보게 하며 인내의 가치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랑은 언제까지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밝은 면을, 그리고 저 미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사랑의 기억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이 여인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음악도 들려주고 시도 들려주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나 남편을 알아보고 아이들도 알아보게 되었다. 남편은 너무 기뻐 소리를 질렀다. 내 사랑을 되찾았노라고.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잊고 죄악 가운데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처럼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 주의 종과 증인들을 통해 '사랑의 기억'을 회복시키려고 애을 쓰신다.
그러다 인간이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차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기적
금슬 좋아보이는 부부가 집회를 마치고 탁자 정면에 서있던 나에게 인사를 보냈다. 그들은 팔장을 끼고 가끔 서로 바라보며 웃기도 했는데. 남편이 자기들 생활에서 일어난 기적에 관해 내게 말하였다. “목사님. 오랫동안 저는 아내를 생지옥에 살게 했습니다. 저는 신의없고 조급하며 독재적이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예. 성가대 대장이었으니 물론 교회도 나갔지요. 사람들은 저희를 단란한 가정으로 보아주었습니다. 아내조차 말입니다. 저는 위선자였습니다. 아내는 이제 올 데까지 왔으며 저와 헤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제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떠한 인간이었는지 깨우쳤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변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아내가 저를 멀리하였습니다. 이전에 저를 사랑한 것은 다 지난 일이며 다시 저를 사랑할 수 없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마음은 그렇게 굳어 졌지만 저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아내에게 구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자 주님께서 절 도우셨습니다. 드디어 아내는. 이혼이 아내가 믿는 모든 것에 위배되므로 다시 부부관계를 유지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저희는 함께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지금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결코 그러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은 죽은 것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십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이 일은 캘리포니아 사우샌스 오크스에서 열렸던 순복음 실업인대회에서 겪은 실화이다. 그 부부는 지금도 그 도시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있다.
사랑의 꽃
제가 알고 있는 고아원 주인이 있는데 그분 말이 고아원 주인들이 억울한 욕을 많이 먹는다고 합니다. 한 달에 10불($)씩 받는 것을 가지고 살림을 꾸려 나가니까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몇몇 학생만을 골라서 고등학교에 보내고 대학교도 보내고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주인에게 반항하는 학생이 생기는가 하면 고발을 하고, 데모를 하고, 심지어는 그의 방에 가서 때려 부수고 별별 스캔들을 만들어서 기자에게 고발을 하고 데모를 한다는 것입니다. 핏덩어리를 데려다가 자기 자식처럼 키운 아버지 같은 분에게 그렇게 했을 때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때, 매를 맞고 욕을 먹을 때 순수한 사랑이 꽃을 피웁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그런 운명을 지녔읍니다. 내가 순수하려 할수록, 주님을 닮으려 할수록 거기에는 주의 발자취인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라 해서 천사를 보내고 비석을 세워 주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를 따를 사람들은 희생을 각오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나눔
몇 년 전 피츠버그에서 있었던 일이다. 몇몇의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은 사람을 믿어주는 사랑의 표현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들은 실업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은 그들을 사랑하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게 되었으며. 또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이후 19개월 동안 그 실업자들 가운데 200명이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한 사랑의 교제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인격적인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믿음을 더하여주게 되자. 그들은 스스로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믿어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그리스도인 사업가들과의 첫 모임이 있은 뒤 한 사람은 “나는 일자리를 찾게 해달라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엔 그날의 기도 시간을 준비하다 말고 갑자기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이봐. 멜. 너는 일자리를 위해서는 이미 기도했어. 이제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니야.” 이튿날 전화벨이 울렸고. 몇 주전 그가 면접했던 한 직장에서 아직도 일자리를 찾고 있느냐고 물어왔다. 바로 그 이튿날부터 그의 출근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믿고 신뢰한다. 사랑은 믿어주고. 불어넣어 주며. 들어올려 준다.
사랑의 능력
나의 친한 친구로서 외국 출신인 어떤 기독교 지도자는 그의 아버지를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친구는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굴욕과 수치를 당해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믿음에 더욱 성숙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의 삶에서 자라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태도가 그릇되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 조건 없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명령하고 있음을 잘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는 나의 설교를 듣고 나서 믿음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버지께 가서 믿음의 의지적인 행동으로, 왜냐하면 솔직하게 그때 그렇게 하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서 멸시받고 버림받았다고 느끼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왔음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설명하기 시작했을때, 즉 술을 마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아버지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켰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거의 전생에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맡기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교제로 나의 친구의 부친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돌아가시기 수년 전에 알콜 중독을 극복함으로써 사랑의 능력의 극적인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사랑의 대가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 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어걸고 함께 사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 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기를 빨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다. 엄마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생명을 건져주신. 아니 우리 가족 전체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사랑의 마음
강아지를 보고 “나는 네가 밉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쓰다듬어주면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난 널 사랑해!”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콱 물어버립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한다고 말했느냐 미워한다고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도, 어떤 비판도, 어떤 훈계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만 틀림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하던 3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토요일마다 주일을 위해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공중 목욕탕으로 곧 바로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소 우리집에 자주 오는 분이어서 낯이 익었습니다. 그가 나를 반기면서 말합니다. “저어, 사모님은 늘 뵙고 신세를 집니다마는 목사님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두둑히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 참, 아무 것도 없네요. 어쩌지요?” 했더니. “에이, 그러시지 말고 좀 주세요. 목사님”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서 저는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붙들어 잡았습니다. 그리고 불쑥 소리쳤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야, . 목사님 참말 고맙습니다. 돈을 얻은 것보다 더 기분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몇번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메아리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쯤 되는 아들을 가진 엄마가 있었는데 그 엄마는 아들이 말을 안 들을 때마다 때리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면서 발로 차기도 했습니다. 그 엄마는 좀 지나친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들도 엄마 못지 않은 반항심으로 그런 엄마를 몹시도 미워했습니다. 나중에는 “저 엄마는 아마도 우리 엄마가 아니고 계모일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호된 꾸중을 들은 아들은 집을 뛰쳐나와 뒷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엄마 앞에서 차마 엄마 밉다는 말을 하지 못한 이 아들은 산을 올라가면서 “엄마 미워! 엄마 미워!”하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중에는 엄마라는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아니라 “너 미워! 너 미워!”라고 크게 고함을 질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온 산이 메아리치며 “너 미워! 너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엄마만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았더니 온 산천이 다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아들은 영문을 몰라 집으로 뛰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만 나를 미워하는 줄 았았는데 산에 올라가서 내가 엄마를 밉다고 하니까 온 산들이 나를 향해 '너 미워!'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놀라 집으로 뛰어왔어요”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어디 다시 한번 고함을 질러 보자. 이번에는 이렇게 한번 해보자.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엄마의 목소리는 온 산천에 메아리쳐 퍼져 나갔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관계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서 하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 나에게 되돌아오는 그 사랑의 메아리는 세 배, 네 배, 다섯 배, 그 이상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향해서 하나를 미워한다고 할 때에 돌아오는 그 미움의 메아리는 세 배, 네 배, 다섯 배로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
어떤 주인이 하녀를 고용하면서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아침 여섯 시까지 일어날 것 둘째. 아침 일곱 시까지 식사 준비를 마칠 것 셋째. 아침 아홉 시부터 청소를 시작할 것.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어길 때는 즉시 해고할 것임. 이 하녀는 고용당한 날부터 매일매일을 무거운 부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주인과 하녀 사이에 사랑이 생겨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직후 하녀였던 부인이 “이제 나는 당신의 하녀가 아니고 당신의 부인이예요. 이전에는 여섯 시에 일어 났지만 앞으로는 열 시에 일어날 거예요”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종의 위치에서 아내의 위치로 이끌어준 남편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여섯 시가 아니라 다섯 시에라도 일어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계약이란 법은 없어졌지만 새로운 사랑이란 법에 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만큼 하나님의 공의를 중시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율법만큼 복음을. 복음만큼 율법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빚진 사람
세리와 바리새의 기도 가운데 (눅 18:9-15) 은총과 긍휼 앞에 선 겸허한 죄인과 자의로 강철같이 버티는 교만한 율법 인간의 표본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사랑의 장부책과 도덕의 장부책에는 잘한 것이나 빚 받을 것은 기록하지 말고 회개할 것과 사랑의 빚진 것만 기록해야 한다. 쥐꼬리만하게 은혜 입혀주고 그를 일생 정신적 노예처럼 내 장부책에, 채무자 명단에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
한 성자가 심판대 앞의 맨 뒷자리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훈장처럼 잘한것을 달고 나온 가운데 그만은 유별났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주여 잘한 일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읍니다."
사랑의 사귐
오래 전 1700년대에 북부 영국에 있는 요오크셔주의 한 작은 마을에 아주 가난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존 포셋은 그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입니다. 가족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13살에 재단사의 견습생이 되기 위해 런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받았습니다. 열 여섯 살 때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러가서 존은 놀라운 회심을 했으며 그의 삶을 침례교 설교자로 드렸습니다. 존 포셋은 웨인스게이트라는 요오크셔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의 봉급은 일년에 200달러가 되지 않았습니다. 늘어나는 식구가 주는 압력 때문에 그는 런던의 한 부유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슬퍼하는 회중에게 고별 설교를 하고 모든 소유물을 짐마차에 싣고 또 존과 아내와 아이들이 거기에 타고 방향을 돌려 떠났습니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아내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습니다. “존, 우리가 어쩌자고 이러는 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날 수 있어요.” 존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 그는 말 머리를 돌려서 목사관으로 돌아와 짐 마차에 실었던 물건들을 모두 집 안에 다시 들여놓았습니다. 그는 짐안으로 들어가 앉아서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안에서 하나이라..피차에 슬픔과 수고 나누고 늘 동고동락 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